혼인지 -> 책방 무사 -> 카페 오른 -> 신양섭지 해변
쌀국수가 먹고 싶다. 점점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긴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다. ‘똣똣’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다행히 맛있다. 흡족하게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왔는데 가방을 놔두고 나왔다.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역시 약간 혼을 빼놓고 다니는구나.
근처에 ‘혼인지’라는 곳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지도에서 뭔가 보이면 가는 식으로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혼인지에서는 전통혼례 행사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혼하는 마당에 혼인하는 곳에 가야 되나 싶지만 뭐 어때. 나는 가보기로 한다.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우선 합격이다. 혼인지는 탐라국의 시조인 삼신인이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 온 나무상자 속의 벽랑국 세 공주를 만나 혼인한 곳으로 그들이 첫날밤을 보냈다는 ‘신방굴’도 보았다. 그곳은 실로 무시무시했는데 성욕이 두려움을 앞섰구나 싶다. 대단해.
혼인지에서 나와 온평리 마을을 구경했다. 귤밭이 보인다. 제주는 어딜 가도 귤밭이라지만 여행 6일 만에 제대로 된 귤밭을 본 나는 흥분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혼비백산하는 꿩을 만들고야 말았다. 육중한 몸으로 파닥파닥 날아오르는 꿩을 보며. 왜 꿩을 먹기 시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살이 많아 보인다) 귤 하나 슬쩍 따 먹을까 싶다가도 산담 옆의 무덤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가족의 무덤 옆에서 밭 일을 하는 기분은 어떨까. 예전부터 궁금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귤밭과 사람 하나 없는 도로를 보고 있으니 행복이 밀려든다. 나는 그토록 내 곁에 사람을 원하면서도 사람이 없는 곳에 오면 이렇게 행복하다.
수산리로 향한다. 그곳에는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 무사’라는 독립서점이 있다. 무인 서점으로 운영 중인데 음악과 향기가 좋아서 계속 머무르고 싶다. 요조가 셀렉한 책들은 밀크 초콜릿보단 다크 초콜릿의 느낌이다. 요즘의 인생이 너무 써서 달고 단 책만 읽고 싶다.
의외로 카페에 가질 않았다. 도착한 ‘오른’이라는 카페가 생각보다 힙해서 조금 놀랐다. 들어가는 동안 쭈뼛쭈뼛하는 나를 알았다. 이제 이런 곳에 드나들기에는 조금 늙어버렸나 싶은 생각이 든다. 건물은 무슨 건축상을 수상할 정도로 멋지고 조경도 더할 나위 없이 건축과 어울린다. 하지만 커피가 똥물 같다. 괜찮다. 커피 맛까지 맛있긴 바란다면 그 또한 내 욕심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서 이른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을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일몰을 보고 싶어 밖을 나왔다. 이곳 성산일출봉의 일출이 정말 끝내준다고 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못 볼 것 같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걷다 보니 신양섭지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벤치에 앉았다. 역시 아무도 없다. 저 멀리 장난치며 뛰어오는 개 두 마리가 보인다. 내 앞까지 와서 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해변가로 달려간다.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바뀌는 하늘이 깜깜해질 때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나는 겁쟁이라 자꾸만 시계를 본다. 제주의 밤은 너무 깜깜해서 밤이 오기 전에 숙소로 들어 갈려고 애쓰게 된다.
사람이란 웃긴 것이다. 그 감옥 같던 숙소가 이제 내 집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