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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May 07. 2024

집을 샀다

도저히 놓아지지 않던 그 마음이

  별다른 일이 없으면(물론, 거의 별다른 일은 없다) 토요일마다 도서관을 가는데 그때마다 산책로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다. 그이는 왼쪽 어깨를 아래로 떨어트리고 왼쪽 팔을 유난히 거칠게 흔들며 곧 쓰러질 것 같은 걷는 특유의 질질 끄는 걸음걸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거나 가끔 웃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그 사람을 만난다. 그건 그가 3시간이 넘도록 같은 산책로를 왕복으로 걷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물론 이 지역은 눈은 오지 않는다) 토요일마다 도서관을 가는 나와 끝도 없이 같은 자리를 걷고 걷는 그 사람.      


집은 포기해도 이 동네는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평일에도 어김없이 같은 산책로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을 보며 이 동네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놓아지지 않던 그 마음이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툭.   

   

이미 문은 한참 전에 열렸었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마치 갇혀버린 것처럼 같은 자리를 끝도 없이 걷고 또 걸었던 건 나였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 동네의 부동산으로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매물들을 알려주고 2시간 뒤에 그 동네로 차를 몰았다. 낯선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익숙한 동네로 가고 싶은 욕구를 꾹꾹 억누르며 8개의 매물을 돌아보았다.      


방마다 살림살이를 뒤집어 놓은 경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집도 있었고 사람이 산다고는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거실 바닥에 흙뿌리가 그대로 달린 대파가 나뒹구는 귀신이 사는 것 같은 집도 있었고 화려하게 리모델링된 집도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햇빛이 잘 드는 고층 위주의 뷰가 트인 집을 원했다. 아파트로만 막혀 있지 않으면 앞에 뭐가 보이든 상관없었다. 누수, 베란다 확장 여부, 새시, 싱크대, 화장실의 상태를 살폈다. 어차피 최근에 전체 리모델링 된 집도 내 취향에는 부합되지 않을 것이므로 베란다가 확장되고 새시가 교체되어서 리모델링 비용이 최소한으로 들어가는 곳으로.      


지금 집보다 마음에 드는 곳은 당연히 없었다. 자포자기의 맘으로 메모장마저 내려놨을 때 마지막으로 들어섰던 집에서 그래 이 집이구나. 이 집이 내 집이 되겠다는 직감이 왔다.      


거실에서는 산과 공원, 물길이 흐르는 산책로와 차로를 포함한 도시 전경이 펼쳐졌고 침실에서는 멀리 달맞이언덕과 동백섬, 광안대교가 보였다. 내가 바란 대로 베란다가 확장되어 있고 새시와 바닥은 완전 새것은 아니지만 한번 교체되었으며 나머지는 거의 순정 상태라 내 취향대로 뜯어고치면 되는 집.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은 오래된 살림살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거실 tv협탁 위의 작은 어항 속에서 구피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곳곳에 스며든 외로움이 곧 나의 외로움이 되리란 생각에 순간 황당하게 웃기면서도 아릿해졌고 수줍게 웃는 할머니를 보면서 재빨리 그 마음을 털어냈다. 악착같이 이 집에 정을 붙이리라. 그리고 활짝 웃으리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삼 넓고 환하고 쾌적하다. 뒤숭숭한 마음을 숨길 재간이 없어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다잡고, 다잡았다. 마음이 바뀔까 봐 집을 본 지 하루 만에 가계약금을 송금했다. 그러나 다잡았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매도인의 무리한 요구로 계약 당일에 계약을 파기하게 되었다. 부모님 앞에서는 내 집이 될 모양이 아니었던 거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왜 이렇게까지 되는 일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내려놓아야 하는 모양이라고. 아직도 내 몫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무엇을 더 내려놓아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산으로 갔다. 중개인의 전화가 왔다. 처음 계약조건으로 계약을 하자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내 욕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살아갈 동네가 어디든 그곳이 어떤 곳이든 간에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그걸 놓치고 있었다. 그렇게 진짜 내 집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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