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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를 믿으십니까?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의 한심한 루틴

by 윤비

타로에 빠져있다. 나를 믿는 것보단 타로를 믿는 게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구독하고 있는 타로가 믿고 싶은 걸 말해주지 않을 때는 바라는 믿음을 찾아 유튜브를 떠돌아다닌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바람과 딱 맞아떨어지는 점괘를 발견하면 매우 놀라워하면서 그것이 나의 운명임을 철석같이 믿고 잠이 든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의 한심한 루틴이다.

얼마나 한심한 짓거리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것으로 인해 비로소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고 쉽게 잠들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러다 나의 이성이 쓸데없이 나의 미래와 타로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음을 밝혀내면 그제야 나는 나를 믿을 준비 태세를 한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 고단하다. 게다가 수고에 비해 수명이 짧아 효율성도 떨어진다. 그렇지만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진리를 믿지 않을 방도는 없다. 나를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이렇게 거창하게 말해놓고 다시 타로를 찾아 유튜브를 기웃거리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나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장치가 생겼다. 이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이제는 내가 나의 상태를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은 벗어났다는 뜻이니까. 여하튼, 타로는 그 장치 중 하나다. 타로도 자신도 믿지 않을 때가 오면 내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로를 찾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다. 아직 희망을 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타로 마스터들은 그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따뜻하고도 확신에 찬 해석을 들려준다. 그래서 나는 타로를 예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심리 치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실현되지 않으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법. 결국 나를 찾게 되는데 나는 그들처럼 나에게 따뜻하고 확신에 찬 믿음을 주지 못한다. 억지로 쥐어 짜낸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덜컥 두려워진다.


이럴 땐 억지로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고 내가 또 돌아버렸다는 걸 재빠르게 인정하고 가만히 지켜본다. 지금 하는 생각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나온 것이니 믿을 만한 게 아니라고. 다행히도 나에겐 미쳤을 때 저질렀던 수많은 데이터 베이스가 든든하게 저장되어 있으므로 이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설득당했다고 또 나댔다간 나 새끼가 또 의미를 찾아 나설 것이 분명하므로 아무 의미 없는,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콘텐츠가 난무한 영상을 본다.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방법이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해서라도 생각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명상 같은 건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다.


시간을 낭비하면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빼꼼히 기어 나온다. 그러면 다시 타로를 보고 타로 마스터에게 복 받으실 거라고 연신 고마움을 외친다. 이렇게 타로는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나를 온전히 믿게 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한때는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삶이 지루하다 못해 재앙이라 생각했었다. 그 삶의 공허함도 알기에 이제는 간절하지 않고 적당히 원하는 게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타로를 봐야 할 만큼이나 간절히 원하는 게 없으면 좋겠다. 그래서 끝내는 내가 타로를, 따뜻한 위로를 찾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타로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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