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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를 찾아서

양기 얻자고 궁궐에 가는 나의 마음

by 윤비

4DX 영화관을 처음 가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이지만 주로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를 보기 때문에 갈 일이 없었다. 그러나 좌석이 들썩이는 순간 너무 신나 버려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겪은 새로운 경험의 주된 감정이 괴로움 혹은 난감함이어서 그것이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갑자기 개어버린 날씨가 아까워서 창덕궁으로 향했다. 최근에 SNS에서 서울에서 음기 가득한 동네를 소개하는 글을 보았는데, 회사가 그중 한 곳에 있었다. 어쩐지 미친놈들이 많더라. 예전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이 동네 분위기가 싫었는데 역시 직감은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다.


며칠 전엔 한밤중에 현관의 센서 등이 절로 켜져서(인생에서 두 번째 있는 일임) 아무래도 그 동네 귀신이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싶었다. 소름 끼치게 무섭지는 않아서(이것도 두 번째 겪는 일이라고) 속으로 ‘여기는 조용하고 재미없다. 네가 안 그래도 지금 충분히 힘드니까 그냥 꺼져라.’라고 쏘아붙이고 잠들었었다. 이러한 이유로 여차여차 양기를 충전하러 궁궐을 가기로 한 것이다.


창덕궁은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꺼리면서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다.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란 역시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그곳에서 가장 화려한 인정전과 가장 소박한 낙선재에 마음이 끌려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인정전은 밖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천장이 높은 1층 건물이었다. 덕분에 천장 매달린 고풍스러운 전등갓에 둘러싸인 거대한 전등이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내부는 바라만 보아도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와서 바깥의 끔찍한 더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같이 느껴졌다. 오래된 먼지 냄새도 좋았다. 의식을 위한 공간은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이구나.


반면 낙선재는 궁궐이라는 위화감이 없는 소박한 공간이었고 인정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깥세상과의 고립감을 느끼게 했다. 이곳에서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삶을 마감했다. 어제만 해도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괴로움은 견딜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옥에서 살아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오로지 내 선택만으로 결정할 수 있다니, 설레고 무섭다.


굿즈는 참을 수 없어서 굿즈샵에 들렀다. 수제 공기를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지난주에 K의 딸과 신나게 공기놀이를 했었다. 치사하게 K의 딸과 같은 편을 먹고 K와 대결을 펼쳤는데 나의 형편없는 공기 실력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아이의 눈빛이 떠올랐다. 치열했던 공기놀이를 치르고 설욕의 기회를 얻고자 공기세트를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결제를 깜빡했는데 이 어여쁜 수제 공기를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만약, 공기놀이를 하지 않았다면 수제 공기에 눈길이 닿지 않았겠지. 대부분의 일이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마지막은 그저 우연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내가 시작했어도 끝은 알 수가 없다.


양기 얻자고 궁궐에 가는 나의 마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도저히 나의 힘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는 길은 왜 매번 이렇게까지 험난할까. 지금 이 경험이 훗날 날 웃게 할까. 울게 할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할까. 다시 무너지게 할 뿐일까.


쿠팡에서 1초도 쉬지 못하고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던 것과 같은 하루를 보낸다. 그사이 폭삭 늙었다. 누구보다 일하는 속도가 빨랐던 사람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일하는 속도보다 새로운 일이 쌓이는 속도가 더 빨라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다.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데, 울고 있을 시간도 없다.


궁궐에서 찾아온 양기는 출근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내주게 맛없는 점심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오래된 먼지가 되어 어딘가로 훨훨 날아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소소한 걱정거리만 있는 그런 날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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