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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코피의 계절이 돌아왔다.

가슴 대신 터진 것 같다.

by 윤비

K의 딸과 나란히 앉아서 K가 30분 만에 휘리릭 만들어낸 소불고기, 감자볶음, 계란말이, 황탯국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요즘 나는 굉장히 많이 먹는다. 야무지게 밥을 먹는 딸을 바라보는 K의 눈에 사랑이 그득하다. 그 모습 위로 젊은 엄마와 어린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도 저랬겠구나. 끝까지 나는 자식의 입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도 K가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K의 딸은 아이가 아니라 나보다 작은 어른 같다. 그래서인지 K의 딸은 나를 약간 모자란 어른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마도 아무렇지도 않게 방귀를 붕붕 뀌고 공기놀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의를 갖춰서 공손히 잘 가라는 아이의 인사를 받고 K의 집을 나섰다. 몇 번 와 보지 않은 동네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 사람 사는 동네라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는 1인 가구가 아니라 1인 이상의 가구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의 느낌이다. 4인 가구, 2인 가구의 구성원으로 살아본 나는 1인 가구의 생활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동네에 오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아껴두었던 콘텐츠를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분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식물이 죽지 않기를 바라며 매일 환기를 하는데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재빨리 씻고 소파에 누워서 K가 챙겨준 귤이나 까먹으며 노닥거리다 잠들고 싶지만, 토요일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 출근의 사유는 선물 포장을 하기 위함이다. 이곳은 여러모로 좋소의 요건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다. 다음 주에 있을 회장의 대통령상 수상을 위해 준비해 둔 캐시미어 머플러 1,000개를 포장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중국 생산 TAG을 제거하고 그럴듯한 TAG를 다시 달고 포장용 종이에 감싸서 상자에 넣는 일과 함께 600여 개의 무선 키보드 박스에 카드를 올려서 함께 리본을 묶는 일과 그 두 개를 담은 쇼핑백에도 리본을 묶는 일을 하게 되었다. 카드에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회사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곳이다.

무선 키보드의 박스에 리본을 묶는 일을 마쳤을 때 홀연히 나타난 회장의 딸이 리본의 모양새가 예쁘지 않다고 해서 오전부터 묶었던 리본을 모두 풀고 그의 취향에 맞게 다시 리본을 묶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리본을 묶었다. 일이 끝나면 창덕궁의 단풍을 보러 갈 생각이었지만 야무진 생각이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고 리본을 묶었던 손가락은 발갛게 부어올랐다.

예전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땐 화가 많이 났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듯했다.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않은 홍보팀을 욕하고 출근하지 않은 나머지 인원들을 욕하고 회장과 회장 딸 앞에선 고분고분했다. 나는 말을 아끼고 쉬지 않고 리본만 묶었다.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고 그들도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직원을 향해 미친 X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내가 없는 곳에서도 나를 그렇게 부를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불쾌하고 기이한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당연히 해도 되는 말인 것처럼 모두가 그런 상스러운 말투를 썼고 나는 그런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리본을 빨리 묶어서 1분이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는 일 밖에 없었다. 요령껏 자리를 비우며 일하는 척하거나 조그만 일에도 큰 소리로 생색내는 사람들 틈에서 바보처럼 1분도 쉬지 않고 일만 했다.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된 고마운 곳이 단지 돈을 버는 곳으로 바뀌었다. 미운 정도 붙지 않는다. 나는 놀랍도록 차가운 구석이 있는데 주로 이럴 때 진가를 발휘한다. 매일 미친 듯이 욕하고 소리치던 P이사는 내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가 없는 사람 같다고 했다. 이곳에 있으면 나의 감정이 아깝게 느껴진다.

집에 와서 쌍코피가 터졌다. 가슴 대신 터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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