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1월의 제주도와 엄마

미아였던 나는

by 윤비

11월엔 어김없이 제주도가 떠오른다.

길을 잃어버린 나. 가도 가도 끝없는.

돌아가야 하는 나, 쉬운 길은 없어서.

돌고 돌아가는 길.

그 추억 다 피해 이제 도착한 듯해.


그해 11월에 길을 잃었었고 가도 가도 끝없는 제주를 돌고 돌았었다. 이곳에 온 지 5개월 만에 마트에서 식자재들을 배달시키기 시작했고 이번 주 주말에는 알배추에 제육볶음을 야무지게 싸 먹었다.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집 안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불현듯 그 추억을 다 피해 이제는 어딘가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건 음식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구나.


피하고 싶었던 추억은 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프지 않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발버둥 쳤던 11월의 내가, 결국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밤마다 울음이 터졌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다. 그때 매일 연락을 기다리며 나를 지켜보던 엄마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셋이서 하던 김장은 다시 부모님만 하게 되었다, 그 일련의 험난한 과정을 두 사람이 끙끙대며 치러 낼 생각을 하니 미안함과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 김장은 자기가 할 거라 호언장담하던 딸은 저 혼자 살겠다고 서울로 도망쳐 올라왔다. 그리고는 김장값 몇 푼으로 죄책감을 씻으려 한다.


부모님과 붙어 지내는 몇 년 동안에 나는 엄마를 많이 울렸고 미워했고 미워했던 아빠와는 조금 친해졌다. 그때 나는 너무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기어코 상처를 주고 마는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마트에서 좋아하는 빵이 나왔다고 부리나케 뛰어가는 엄마가 그때는 미웠었다. 무릎 때문에 살 뺀다고 해놓고선 조기품절 되는 빵을 샀다고 활짝 웃던 엄마가 그때는 귀엽지 않았다.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내가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활짝 웃던 그때의 엄마를 생각한다. 아마도 이 장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두고두고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짓을 굉장히 많이 했다. 엄마가 나를 너무 사랑하는 걸 믿고 저질렀던 일들이다. 내가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 상태로 있기 위해서, 정확히는 내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 곁에 있든 멀리 있든 한결같은 엄마와는 다른 것이다.


회사에서 회장의 어깨와 발을 마사지해 주는 이사를 목격했다. 한 번이라도 내가 엄마의 발을 주물러 준 적이 있었던가. 이사는 요양원에 계신다는 엄마의 발을 만져준 적이 있을까. 조용한 사무실 내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미련 없이 이곳을 그만두는 결심을 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회장의 발을 마주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엄마가 생각났다. 본인의 발은 감추고 차가운 내 발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엄마의 손이. 좋아하는 빵을 손에 들고 나를 맛보게 해 줄 생각에 활짝 웃던 엄마의 얼굴이.


떨어져 살다 보면 애틋해진다. 너그러워지는 게 참 쉽다. 그래서 내 사랑이 제법 큰 줄 알지만, 그건 단지 곁에 있을 때 애틋하고 너그러워지는 걸 하지 못하는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엄마가 몹시도 보고 싶은 11월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겨울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