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셋, 시부야

일본 여행 2일 차

by 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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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통잠을 잔 건 처음이다. 자세 한번 바꾸지 않고 누운 자세 그대로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한 여행 2일 차. JR 야마노테선 라인을 타고 시부야로 향했다. 적어도 15년 동안 1년에 2번씩 신주쿠, 이케부쿠로, 시부야, 긴자 같은 지역에서 시장조사를 했지만, 굳이 여행으로 도쿄에 온 이유는 K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K의 생일기념 여행에 P와 내가 합류하게 되면서 여행으로는 처음으로 도쿄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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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에 도착하자마자 BUY ME STAND라는 그릴 샌드위치 가게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오렌지, 소고기, 블루치즈가 들어간 BLUE MONDAY, 아보카도, 시금치, 바질 페스토와 치즈가 들어간 HELLA GREEN, 4가지 치즈가 들어간 SON OF THE CHEESE와 커피를 시켰다.

바에 앉아 저렇게 빵을 격렬하게 태우는 것이 레시피인지 미숙함인지 암살 의도인지를 가늠하며 오랜만에 연하게 내린 원두커피를 보리차처럼 후후 불어 마셨다. 연한 원두커피를 마실 때면 부모님이 쫄랑이와 함께 매장으로 출퇴근했던 때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엄마가 커피를 내리면 코스트코의 원두마저도 아주 맛있고 향기로웠다.


식욕이 없는 K 대신에 P가 야무지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영상 속 개, 고양이 말고 눈앞의 인간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뿌듯함이 느껴지다니. 어쩌면 이것은 누구나 느끼는 흔한 감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드물게 일어나는 감정이다. 평소에 음식을 맛없게 먹는 편인데(소화력이 약해서 조금씩 깨작거리며 오래 씹어 먹는다) 어쩐지 와구와구 먹는 날엔 사람들이 날 너무 좋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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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스크램블 교차로 근처의 러쉬에서 K와 P에게 DADDY O를 강매시키다시피 권하고 요시다 포터에서는 정작 사고 싶었던 지갑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사지 못했다. 요즘 상당히 과소비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도 비싼 지갑(내 기준에서는 십만 원 단위의 것들)을 사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 같다.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서점을 향해 걸었다. 동네에서 부내가 흘러넘친다. 집 주변 환경보다는 집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더 중요했었지만,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살아 본 결과 내가 유독 편하게 느끼는 동네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부내가 흘러도 살고 싶지 않은 기운이 도는 동네가 있고 낙후되었음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네가 있다. 생각하면 그리운 동네가 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동네가 있다. 지금 사는 곳은 그럭저럭 마음이 편안한 동네다.


어디나 그랬지만 츠타야 서점 역시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우리는 겨우 스타벅스에 앉아 K가 챙겨 온 고함량 비타민을 들이켰다. 살아오는 동안 기력 충만했던 K는 기력이 없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래 이렇게 온몸이 아프고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냐고 물었다. 기침만 해도 어깨가 으스러질 것 같은 나는 평생을 그 기력으로 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오히려 피곤을 모르고 살았다는 K와 P가 더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몸은 오랫동안 기력 없음에 익숙해져서 어떨 때는 예전보다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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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기다리며 드디어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진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피하고 있지만, 여행지에서는 사진을 많이 찍자 했었다. 나인 것 같지 않은 나와 우리를 찍고 싶지는 않아서 기본 카메라로 찍었더니 다들 사진을 보고 두 눈을 찔끔 감는다. 기력 없는 K가 어플 깔린 자신의 폰을 내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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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항야 잇신이라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점심에는 일본 가정식을, 저녁에는 간단한 안주와 술을 마시는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이다. 우리는 도미 솥밥, 뿌리채소 샐러드, 계란말이, 튀김을 시켰고 P는 맥주를 K와 나는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처럼 우롱차를 주문했다.(줄곧 술집에서 우롱차를 시켜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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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로 강의 벚나무는 아직 꽃봉오리가 완전히 터지지 않았다. 강을 따라 늘어선 핑크빛 등불이 봄을 기다리는 나무를 비추고 다리 밑에서 흐르는 강물은 까맣고 끈적이는 타르 같아서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무섭다는 말이다. 뭘 찍어도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어 이쯤에서 사진은 포기하고 하라주쿠로 향했다.


하라주쿠에 갈 때마다 먹고 싶었지만 먹지 못한 크레페를 이번엔 먹어보려 했으나 이번에도 먹지 못하고 닛포리로 돌아와 역 근처에서 오뎅을 먹었다. 푹 익어서 짭조름한 국물을 잔뜩 머금은 무 한 조각을 입안 가득 넣고 씹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었는데, 무는 서걱거렸고 우리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편의점에서 사 온 빵을 잔뜩 먹었다. 내 생각에 일본의 맛집은 편의점이다.


어제와 같이 반신욕을 했다. K가 건네준 알록달록한 입욕제 중에서 보라색만 몇 알 골라 욕조에 집어넣었다. 보랏빛 물이 곧이어 메구로 강의 등불 빛으로 바뀐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건조한 날씨 때문에 코점막이 갈라져서 나오는 코피가 있고 순수 피곤으로 코점막이 터져서 나오는 코피가 있는데 이번 주 내내 후자의 이유로 코피가 터졌다. 그러나 지금의 코피는 행복해서 터져 나온 코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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