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1일 차
회사 행사로 유독 힘들었던 5일을 보내고 금요일 오후 공항철도를 탔다. 핸드폰을 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거나 나처럼 핸드폰을 볼 기력도 남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눈을 감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저전력 모드로 살아온 인간의 가장 확실하고도 손쉬운 에너지 충전법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것. 혼자만의 세상으로 뚝 떨어져 나가 있으면 서서히 기력이 올라온다.
마찬가지로 여행 전에 많은 정보를 검색하는 일 또한 에너지 소모가 크고 여행의 설렘을 반감시킬 가능성이 농후해서 하고 싶은 일만 간단하게 메모했다. 점점 불안보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안이 되어 가고 있다.
푸드코트에서 비싸고 맛없는 닭갈비를 먹는 동안 얼굴이 반쪽이 된 K가 나타났다. 소음인인 나와 정반대인 태양인 K는 마운자로를 맞느라 난생처음으로 식욕 감퇴라는 것을 겪고 있다. K는 기운이 없는 상태로 인터넷 면세에서 오만가지 아이템을 쇼핑했고(나는 인터넷 쇼핑으로도 에너지를 빼앗길 게 분명해서 사이트에 접속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련한 눈빛을 하고 카페에 앉아 힘겹게 더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를 바꿔서 귀에 꼈다. 역시 태양인은 쫓아갈 수가 없어.
1년에 2번씩 출장을 다녔던 일본이지만, 언제 가봤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공항에서 비짓재팬에 접속해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다 말고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이래서 어젯밤 P가 탈탈 털렸구나. 아아 이제 종이와 펜의 시대는 끝났다.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처리될 미래가 갑갑하다. 점점 편리해질 세상이 나는 점점 불편해질 것이다. 죽을 때까지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고 익혀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몹시 고단하게 느껴진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스이카 충전을 하고 처음으로 모노레일을 탔다.(그동안은 리무진만 타고 다녔다.) 낯선 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길을 찾을 땐 절박한 심정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참을 헤매면서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안되면 숙소에 도착한 P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하자. 그렇게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가까스로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번엔 내가 구글맵을 켜서 미리 알아본 맛집으로 안내했다. 뒤에서 K와 P가 수군거렸다. ‘든든해. 저 자신만만한 발걸음 좀 봐.’
늦은 시간이라 오더 마감으로 몬자야키를 먹지 못했고 역 근처에서 우동과 돼지고기 생강구이, 생강초절임과 시소가 들어간 돼지고기 튀김을 먹게 되었다. 생강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예 인지하지 못했는데(우리 가족은 생강을 몹시 좋아한다.) 놀랍게도 K와 P가 생강을 먹지 못했다.(왜 시키기 전에 미리 말하지 않았니.)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꽤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선 역시 까불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이토록 오래 알고 지냈어도 또 몰랐던 사실이 튀어나오는 순간은 재밌고 흥미롭지 않은가.
평소 푸딩을 먹지도 않으면서 일본에만 오면 편의점 푸딩에 집착하는 우리는 숙소 침대에 걸쳐 앉아 푸딩과 왠지 그것을 상쇄시켜 줄 것 같은 표고버섯칩을 과작콰작 씹어 먹었다. 번화가의 호텔은 감히 예약하지 못했고 닛포리 역 근처 한인이 운영하는 숙소로 예약했는데 나이가 들면 비교적 돈 걱정 없는 여행을 할 줄 알았지만 돈 걱정을 하는 것은 어릴 때와 변함없고 푸딩 맛에 환호성을 지르며 1일 3 푸딩을 하겠다는 것도 똑같았다. 아마, 할머니가 돼서도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호들갑을 떨며 푸딩을 먹고 있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는 3명이 묵기에 충분히 크고 군더더기 없었으며 침구마저 포근하고 깨끗해서 여행지에 온 이래로 가장 편안한 잠을 잤다. P가 미리 켜 놓은 전기장판의 온기를 느끼며 온종일 긴장한 몸뚱이를 대자로 펼치고 쭉쭉 늘였다. 에구구구 소리가 절로 나오고 행복하단 소리가 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