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여행
계단을 올라가다가 계단 끝에 운동화 끝이 걸려서 넘어졌다. 기특하게도 나의 두 팔이 재빨리 계단 바닥을 지탱해 줘서 얼굴이 갈리는 불상사는 피했고 계단을 오르다 갑자기 다소곳이 계단에 앉아버린 여자가 되었다.
러닝으로 왼쪽 무릎의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그 무릎이 계단의 날 선 부위에 찍혀버려서 고통으로 정신이 아연해졌다.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계단에 앉아 한번 넘어지기 시작하면 계속 넘어지는 시기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당일 아침에도 조금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굳어가던 피딱지가 다시 반쯤 벗겨지고 다시 생기는 과정을 반복한 탓에 무릎에 크고 작은 흉터가 많다.
어린이는 근육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이라 그랬겠지만, 지금은 있던 근육이 빠지고 있어서 다시 넘어지기 시작한 건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눈이 아파 책을 오래 읽을 수 없고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가는 것이 무서워서 천천히 내려간다.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순간이 나에게도 조금씩 찾아오고 있다.
친구들과의 일본여행을 코앞에 두고 하체 운동을 시작했다. 단지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 다니기 위해서. K와 P도 나와 같은 이유로 하체 운동을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중년의 여행은 여행지에서 입을 옷, 맛집과 쇼핑 리스트뿐만 아니라 하체 운동도 필수라는 것을.
일본에 앞서 혼자 광주를 갔다. 오리탕으로 몸보신하려는 욕망을 품었으나 1인분을 팔지 않아 애호박 찌개로 노선을 틀었다. 식당은 오후까지는 주로 식사를 팔고 저녁에는 술을 파는 식당이었다. 할머니의 식당도 이랬다. 할머니는 식당에 딸린 욕실 구석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과연 저 조그만 애가 샴푸거품을 잘 헹궈 낼 정도로 성장했는지를 의심하며 내가 도움을 청하면 당장이라고 뛰어올 준비를 하고서.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엄마의 엄마다웠구나 싶다.
전라도는 어딜 가도 맛있다는 말에 의구심을 잔뜩 품고 반찬으로 나온 미나리 무침을 조심스레 집어 먹었다. 이럴 수가, 그 말은 사실이었구나. 지금까지 내가 먹은 미나리 무침은 초장이나 맛소금과 참기름으로 무쳐낸 것들이었는데 이건 생전 처음 먹어보는 감칠맛이 난다. 소금도 아니고 간장도 아니다. 액젓을 넣은 것 같다. 애호박찌개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살아났다.
내 인생의 첫 애호박찌개는 예상했던 맛은 아니었지만 담백한 애호박찌개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이것 말고도 처음 겪게 될 일들은 앞으로도 셀 수 없이 많겠지. 애호박찌개를 앞에 두고 별안간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식당을 나와 근처의 독립서점을 들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샀다. 이 아저씨가 달리기를 말할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지 감도 안 온다. 하루키는 40대 후반에 러너의 정점을 찍었다고 말했다. 또 가슴이 두근댄다. 별다른 재능이 없는 내가 그나마 잘하는 건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과 더불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는 것인데 그 무언가가 달리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뛰는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근사하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했는데 아무래도 최악의 숙소를 찾아내는 재능도 있는 듯하다. 아무리 시설이 좋더라도 낯선 곳의 욕실을 사용하는 건 꺼림칙한 구석이 있어서 내가 여기서 옷을 벗어도 되나 싶게 만들고 발가벗고 서 있는 나를 보는 건 영혼까지 발가벗겨진 기분을 들게 하므로 최대한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오늘 하루의 때를 재빨리 씻겨낸다.
다음날 콩국수와 떡을 먹을 생각에 저녁을 건너뛰었지만 콩국수집은 문을 닫았고 예약 주문한 3kg의 떡은 예상보다 무거워서 떡을 받아 든 몸이 휘청거렸다. 떡집 주변의 보도블록에 떡고물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떡을 먹으려는 누군가의 조급함에 웃음이 났다.
다들 1박스씩 사가는 떡을 종류별로 혼자서 5박스나 들고 걷느라 조금 멋쩍었는데 길을 걷던 원주민이 나에게 물었다. 지금 사신 떡이 유명한 떡인가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 호박 인절미라고요..
요즘은 호박 인절미가 그 정도로 맛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너무 맛있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무엇이든 경험할 수 있다면 경험해 보려고 한다. 호박 인절미는 폭닥하고 부드럽고 쫀득하니 맛있었다.(녹두통밤찰떡도 맛있습니다. 여러분.) 내년에도 공연을 보러 광주에 오게 된다면 그땐 욕심부리지 않고 1박스만 사야겠다.
지하철 안에서 떡 비닐봉지에 눌려 하얗게 질려버린 나의 손가락을 본 아주머니가 자신의 무릎을 톡톡 치며 떡을 올려놓으라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나는 마찬가지로 소리 내지 않고 입을 크게 벙긋거리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눈빛이 선한 그에게 맛보시라고 떡 몇 개를 드리고 공연장에서 쏟아진 컨페티가 잔뜩 들어간 떡 봉지를 그대로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광주, 애호박찌개, 싸구려 호텔, 떡, 공연, 컨페티. 이것이 바로 중년의 여행이다.(하체 운동은 효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