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벌스데이 투 미

국밥의 위력

by 윤비

회장은 커다란 제기에 가득 담긴 찰밥과 묵은 나물을 앞에 두고 뒤돌아 서서 말했다.

‘혹시, 생리하는 사람 있나?’

자신의 생리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회장은 마치 더러운 물건을 치우듯 모든 여자들을 밖으로 쫓아냈다. 유리문 밖에서 회장과 남자들이 제를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J의 조상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온몸에 기름 냄새를 풍기고 혼자 차디찬 부엌 구석에 오도카니 서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절을 하는 남자들을 바라보았었다. 일 년에 3번씩, 십 년이 넘도록 해 왔던 일이었지만, 끝내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순 없었다.

내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했던 할머니들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할아버지들이 생각났다. 나는 멀리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이젠 그런 감정을 느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는 모양으로 난데없이 정월 대보름에 회사에서 그때의 기분을 다시 맛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웃으며 넘길 수 없었던 이유는 정월 대보름이 나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생일에 대한 의미가 퇴색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생일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날이기 때문에. 엄마의 사랑과 고통의 결과물로써 이날만큼은 나를 귀하게 여기려고 하는데 졸지에 부정한 것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제사를 끝내고 늦은 아침으로 수십 명의 직원들이 찰밥과 나물을 나누어 먹었지만, 도무지 그것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배가 고파 머리가 핑그르르 돌면서도 끝내 한 숟갈도 먹지 않고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입사 후 처음으로 도망치듯 칼퇴했다.

찬바람에 흩날리는 코트 깃을 여미며 순대국밥집을 향해 걸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 사이에 홀로 앉아 친구들이 보내온 새빨간 달 사진을 보며 새빨간 순대국밥을 한 알, 한 알 소중하게 음미하며 천천히 씹어 삼켰다.

옆 테이블에는 부부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가 앉았다. 여자가 섞박지를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자르는 동안 남자는 핸드폰을 보며 순대국밥을 먹었다. 여자는 홀직원에게 남자가 먹은 수육 접시를 치워 달라고 몇 번 요청하려 했으나, 바쁜 홀직원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남자는 여자에게 그만하라며 짜증을 냈다. 이것이 그들이 나눈 유일한 대화다.


여자는 순두부찌개에 밥 2 공기를 먹었고 남자는 밥 1 공기를 채 먹지 않았다. 섞박지를 자르는 수고와 좁은 테이블에서 상대방의 빈 접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다 놓은 배려를 보지 못하는 남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잘생긴 남자들은 멸종한 것 같다.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온종일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속이 뜨끈해지고 배가 불러오자 옆 테이블 남자를 잘근잘근 씹어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내일은 다시 평소처럼, 시트콤 속 주인공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

두둑한 배로 도착한 집은 유난히 싸늘하다. 보일러를 틀고 평일 퇴근 후에는 앉지도 않는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방탕하게 핸드폰을 보며 1시간을 흘려보내고 달리러 나갔다. 하늘에는 사진 속에서 보았던 새빨간 달이 떠있다. 소원을 빌었다. 나의 소원은 언젠가부터 딱 한 가지다. 내가 아는, 내가 좋아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평온.


나는 약간 남은 분노의 앙금과 순대를 연료 삼아 9KM를 달렸고 다시 따뜻해진 집으로 돌아왔다. 해피 벌스데이 투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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