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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매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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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지런한백수 Jul 11. 2021

19년간 외동이었습니다만 언니가 되었네요.

 동생이 태어났을 때 무엇이 제일 힘들었나요? 묻는다면 대답은 딱 하나다.

A. 제가 사라졌습니다.




 19년간 구축해온 모든 가치관과 생활패턴, 선택의 기준, 감정 표출과 행동의 과정들이 바뀌었다. 얄팍한 마음으론 내가 부모라면 억울하지도 않다. 내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 것까지 모두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 그러나 아직 성장의 길이 열려있고 선택의 순간들이 많은 20살에겐 동생의 탄생과 함께한 거주는 아주 작은 돌덩이를 베개 부근에 넣고 매일 아침 뻐근하게 일어나는 것과 같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무런 능력도 없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독립을 해야 했었다. 그러면 우울함도 깊어지겠지만 생활력도 늘어났겠지.


 간혹 부모는 간과한다. 20살에게 어떤 삶의 가치와 선택의 기준과 감정과 행동의 이유들이 있는지에 대하여. 따라서 경제적인 이유와 형제, 가족, 부모, 자식, 등 당장 제시할 수 있는 이유들로 모든 것을 합리화시킨다. 가장 멍청한 것은, 스스로도 그 ‘합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망하는 지름길이다. 실제로 나와 육아를 담당했던 엄마는 2-3년간 살얼음 같았던 길을 걸었고 서로 마음이 떠났느니, 더 이상 모녀지간이 아닌 것 같다느니의 말을 계속하며 서로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내었다. 아직 나는 그 상처가 회복이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내 건 합리화는 딱 하나였다. 엄마와 경제적인 이유. 그래서 나는 사촌에게도, 주위에게도 그냥 미친 척 망나니 인척 돈을 지원해달라 하고 마주할 수 있는 갈등과 어려움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22살에 대학에 들어가며 집에 남아 동생을 담당하였던 건 오로지 엄마가 일을 다시 시작할 때 도울 사람이 나였으며 대학생인 내게 시간이 많다는 이유였다. 나는 몰랐지, 대학생이 바쁘게 무언가 계속해야 하는 존재였다는 걸.


 어설프게 착한 척 흉내 낼 게 아니면 가족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길 바란다. 돌아오는 건 결국 당연시 여기게 되는 마음과 그 속에서 가지게 되는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이다. 적어도 스스로를 부담할 수 있을 때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이라 할지라도 돕다보면 자신은 돌보지 못한 채로 남을 보는 상황에 어떠한 문제점이 생겨도 반박을 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면, 부모님은 일하시고 저녁에 돌아오시느라 힘든 상황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집에 예민하고 울부짖는 3세 아이가 있다. 어? 그런데 성인의 22살인 또 다른 자식이 있다. 이때, 모두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은 언니가 동생을 돌보는 것이다. 부모를 돕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니까.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역할’ 얼마나 멋진 말이던가. 같은 이유로 3년을 버텼는데 아이를 막 출산한 부모처럼 친구들과의 관계와 다른 경험의 기회를 잃은 채 매일 울부짖는 동생을 돌보다 힘든 티를 내니 돌아온 말은 하나였다.


 “철이 없는 건지. 나는 너무 힘든데 너는 거기서 떼를 쓰듯 감정적이니까”


 이 말을 갈등이 심화됐을 때 들은 것이 아니었다.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들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계속해서 이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본체 ‘굳이’ 말하는 타입이 아니기에 말을 하지 않았다.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말은 없다.

 감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엄마에게, 엄마를 돕느라 친구들과의 약속을 미루고 주말을 오로지 동생에게 희생하며 또래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한 발전을 위해서도 아닌 동생에게 시간을 할애한 나는, 힘들다고 찡찡 거리는 철없는 큰애였던 것이다.

 

 19년간 외동으로 자라며 혼자 하는 게 익숙하고 일하느라 바쁜 부모님이 나가 계시면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다. 모든 선택과 감정의 이유는 오로지 ‘나’에게서 시작됐다. 내 미래를 생각하고, 내 감정과 내 가치관을 생각하며 혹은 휩쓸려 친구와 함께 동행하고 등의 모든 것들은 다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작은 핏덩이가 태어나며 모든 것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생물학적인 언니가 되었다 하며 나 자체도 언니가 되길 바라는 건, 제 아무리 자율성을 강조하였던 부모님이라 하여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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