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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by 신승건의 서재 Aug 12. 2018

부모와 아이 사이

일전에 다른 글에서 밝힌 적이 있다. 내가 이곳에 글을 쓰는 이유 가운데 그 어떤 것보다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 말이다. 나는 내 아이에게 정신적 자산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기에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걸어온 내 삶이 정신적 자산을 논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것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아주 평범한 동네 의사다. 아침마다 진료실에 나와서 나를 믿고 찾아와주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내가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내가 배운 것으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마다 주워 담는 행복감을 연료 삼아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평범함도 거저 주어지지는 않았다. 세상 사람 가운데 누가 안 그러겠느냐마는, 나 또한 나름대로 말 못 할 힘든 시기를 겪었다. 시기와 질투의 공격을 무방비로 감당해야 했다. 답이 없는 고민에 짓눌려 잠 못 이루기도 했었다. 때로는 인간적인 감정에 취해서 지나치게 순진했었고, 그러다가 믿었던 이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런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은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겪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그런 깨달음 말이다. 그러한 깨달음을 거름 삼아서 오늘의 평범함을 누리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언젠가는 나의 딸아이도 알게 될 것이다. 선의가 언제나 보답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이들은 아니란 것을 말이다. 세상은 절대 공정하지 않으며 생각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란 것을 내 딸아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진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한다면 결국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은 직접 겪어야 진정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한 세대를 먼저 살아본 부모로서 나의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곳에 글을 올리는 단 하나의 이유다.


그런데 가끔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훗날 나의 아이가 나의 글을 읽을 때, 정말 도움이 되겠냐는 의문 때문이다. 내가 아이의 관점에서 내 글을 읽어보니 솔직히 별로 읽고 싶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글솜씨가 부족한 것도 이유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뭔가 교훈을 주고 싶어 안달인 것은 알겠는데,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그냥 이유 없이 거부감이 든다고 해도 되겠다.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까. 아니면 내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고민 끝에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데 몰입한 나머지, 정작 아이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먼 나중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요즘 들어 딸 아이가 부쩍 아빠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제법 고집도 부릴 줄 알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꾀를 피울 줄도 안다. 미운 네 살이라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정작 나를 놀라게 하는 건 어느덧 고집을 부릴 만큼 자란 딸 아이의 모습이 아니다. 정말 내 정신을 번쩍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호통치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


이때 집어 든 책이 <부모와 아이 사이 원제>이다. 교육학자 하임 G. 기너트가 쓴 이 책은 부모 교육 분야에서는 고전이자 필독서로 통하는 책이다. 명색이 아이를 위한 서평을 쓴다면서 나는 이런 책을 안 읽고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있던 것인가. 나는 자신을 돌아볼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책을 펼쳤다.


참고로 2006년에 MBC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이란 제목의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나와 아내는 이 다큐멘터리도 찾아서 보았다. 10년이 지난 방송이라 화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책을 읽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 다큐멘터리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부모와 아이 사이>의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이면 ‘훈계가 아닌 공감으로 아이를 대하라’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저자는 아이가 울고 있으면 “그만 울어라.”라고 훈계하기보다는, “슬픈 일이 있나 보구나.”라고 아이의 감정을 매만져 주라고 말한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학생은 학교에 가야 해.”라고 훈계하기보다는 “학교에 가기 싫은 일이 있나 보구나.”라고 먼저 아이의 마음을 살피라고 한다. 만약 아이가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설쳐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른 자라. 그래야 내일 지각하지 않지.”라고 말하기보다는 “아직 잠이 안오는가 보구나.”라는 식으로 아이의 감정을 살핀다. 여기서 핵심은 훈계보다는 공감으로 아이를 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공감의 요점은 어른인 나의 관점이 아닌 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새로운 생각은 아니란 점이다. 이건 성인 대 성인의 관계에서는 상식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기본 중의 기본 원칙이 아니던가. 만약 성인 대 성인의 관계에서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 뭐라고 하는가. 이기적이고 예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아이들을 대할 때 종종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믿은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어른이기 때문에 스스로 아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 결과 알게 모르게 상대방인 아이들의 감정을 무시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정말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인격적으로 우월한 존재인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할 뿐이다. 감정이 무디지도 않다. 오히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세심하고 예민한 감정이 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덜 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감정을 무시하는 건 어른들이 자신들의 왜곡된 믿음으로 저지르는 무언의 폭력이다.


그러면 공감보다 훈계로 대할 때 아이들은 어떤 느낌이 들게 될까. 여기 가상현실 도구가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훈계를 마주하는 아이들의 입장을 경험해볼 때가 있다. 직장에서 권위적인 직장 상사를 만날 때, 은퇴하고 자영업자가 되어 무례한 손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바로 그 아이들의 입장이 된다. 당연히 긍정적인 의욕이 사라지고 우울감이 쌓여간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그동안의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내 뜻을 따르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가려서 아이의 감정을 무시한 적은 없었나. 그 상대가 만약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도 그렇게 대했을까. 내가 아이의 감정을 살피지 않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했을 때, 아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 자신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본다.


훈계보다는 공감을. 어쩌면 상대방에게 대우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우하라는 황금률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 상대방이 어른이 아니라 어리고 약한 아이일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세심하게 이 황금률을 지켜가야겠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2018/08/12/%eb%b6%80%eb%aa%a8%ec%99%80-%ec%95%84%ec%9d%b4-%ec%82%ac%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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