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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Dec 22. 2018

10퍼센트 인간

2004년도에 개봉한 영화 <에비에이터>는 20세기 미국의 사업가 하워드 휴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워드 휴즈는 상속받은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영화와 항공 산업에 족적을 남긴 사업가인데, 영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했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14년이 되었지만, 나는 가끔 삶이 지치고 힘들 때면 이 영화를 찾아서 다시 돌려보고는 한다. 영화가 하워드 휴즈의 일생을 통해 보여주는 어떤 메시지, 즉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화려하고 성공적인 인생도 결국은 혼자 왔다 혼자 돌아가는 것'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대한 성찰을 곱씹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영화는 중간중간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하워드 휴즈는 손을 씻을 때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문지르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혹시 모를 병이 옮을까 극도로 신경을 쓰는데, 이런 장면들은 그의 결벽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극적 설정이다. 실제로 하워드 휴즈는 결벽증이 심했다. 일설에 따르면, 하워드 휴즈의 결벽증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병균의 위험에 대해 강조했던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만 해도 결벽증은 하워드 휴즈처럼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위생적인 생활환경 자체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의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생활환경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하워드 휴즈의 어머니의 사고방식을 따르는 이들도 많아졌다.

‘면역은 키우고 세균은 죽인다.’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이 종교처럼 갖는 믿음이다. 그런 믿음에 기대어, 각종 면역 향상을 장점으로 내건 인터넷 광고들이 넘쳐나고 항균 인증을 받았다면서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생활용품들이 마트 진열장마다 도열해 있다. 하지만 때로는 당연한 것에도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세균이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란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그저 해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몸속에 다양한 세균을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몸에 정상적으로 있어야 하는 미생물을 일컬어 정상 세균총(normal flora)이라고 한다.

우리 몸에는 뼈와 살을 구성하는 세포보다도 열 배나 많은 수의 정상 세균총이 함께 살고 있다. 모든 것에는 존재 이유가 있다. 더구나 그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면 그 중요성도 크다는 단서이다. 그런데 이 미생물들이 평소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소리 없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기에, 우리는 종종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낸다.

이처럼 평소에는 조용히 살아가는 정상 세균총의 소중함을 느껴보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들이 사라지는 상황을 겪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한평생 곁에 있을 것 같은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그제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서쪽에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미세먼지 뉴스를 볼 때마다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낀다.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엘레나 콜렌은 그의 책 <10퍼센트 인간>에서 몸속 세균들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진화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해온 저자는 현대인을 괴롭히는 여러 질병이 정상 세균총이 사라진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상 세균총의 중요성은 우리 몸을 둘러싼 대표적인 두 개의 장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장과 피부다. 피부를 장기의 하나라고 할 때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겠는데, 피부는 인체의 대사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장기가 맞다. 사실상 우리 몸의 가장 큰 장기라고 할 수 있다. 장이 몸을 둘러싸고 있다는 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인체의 구조를 극도로 단순화해서 보면 빨대에 비유할 수 있다. 음식물이 한쪽 입구인 입으로 들어가서 다른 쪽 입구인 항문으로 나가는 빨대 말이다. 즉 장은 입과 항문을 통해 외부와 연결된 구조이므로 음식물이 통과하는 통로일 뿐 진정한 몸속은 아니다. 진짜 몸속은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는 몸의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장이 몸을 둘러싸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장내의 정상 세균총에 대해서 살펴보자. 병원 입원 중에 발생하는 설사의 가장 흔한 원인으로 꼽히는 위막성 대장염(Pseudo Membranous Colitis, PMC)은, 항생제 사용 후에 장내 정상 세균총이 사라질 때 발생한다. 장 속에 원래 평화롭게 살던 미생물들이 항생제에 쓸려내려 가면, 그 빈틈을 비집고 시디프(C. difficile)라는 해로운 미생물이 자리를 잡고 독소를 내뿜는다. 이 독소 때문에 장벽이 망가지고 복통과 설사 등의 증상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위막성 대장염이다.

한편, 장내 미생물의 변화는 비만에도 영향을 미친다. 섬유질이 풍부한 식사를 하는 사람과 가공식품을 섭취한 사람의 장내 미생물을 서로 비교하면 그 구성이 크게 다르다. 이렇게 가공식품 때문에 변화된 장내 미생물 조성은 그 자체로 비만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위막성 대장염과 비만의 사례는 장내 정상 세균총이 사라지거나 왜곡되었을 때 그 숙주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위막성 대장염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의 장에서 추출한 미생물을 옮겨주면 위막성 대장염이 호전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부 연구에서 비만하지 않은 사람의 장에서 미생물을 추출하여 비만한 사람의 장에 옮겨주니 비만이 완화되었다. 건강한 미생물이 몸속에 들어와서 그 숙주가 되는 사람의 건강도 개선하는 것이다. 최근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여 장내 미생물 불균형에 의한 질환들을 치료하는 방법이 주목받고 있는데, 이를 대변 이식술(Fecal Microbita Transplantation, FMT)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건강한 사람의 대변을 아픈 사람의 장에 옮겨주는 치료법이다.

이어서 피부의 정상 세균총의 중요성도 살펴보자. 장내 정상 세균총과 마찬가지로 피부의 정상 세균총도, 그것이 결핍될 때 그 중요성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피부의 정상 세균총이 사라지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바로 제왕절개술을 통해 태어나는 아기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제왕절개술이 질식 분만을 종종 대신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수술받는 산모나 수술하는 집도의 모두 흔히 놓치는 큰 위험이 있다.

아기는 처음 세상에 나올 때 어머니의 질을 통과하며 다양한 미생물을 몸에 묻히게 되는데, 이때 만나는 미생물들은 이후 아기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생의 보호막과 같은 기능을 한다. 반면에 제왕절개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는 이런 정교하게 준비된 미생물 세례를 받을 기회를 뺏긴다. 결국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기는 질식 분만으로 태어난 아기에 비해 겪지 않아도 될 질병을 더 자주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질병의 대표적인 예가 아토피나 비염과 같은 알레르기성 질환이다.

요컨대, 몸을 둘러싼 두 개의 큰 장기들인 장과 피부에서 살펴본바, 정상 세균총을 잘 보존하는 것이 곧 몸 전체의 건강에 직결된다. 그리고 이를 인위적으로 제거하거나 차단하는 현대 의학의 치료법들은 뜻하지 않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우리 몸속의 유익한 미생물들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하고 싶다.

첫째, 항생제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항생제의 무분별한 사용은 항생제가 듣지 않는 내성균의 발생을 초래하여, 차후에 정말 항생제가 필요한 상황이 왔을 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도한 항생제는 몸속의 유익한 미생물을 억제하여 앞서 살펴본 다른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섬유질이 풍부한 건강한 식사를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몸에 어떤 미생물이 살아갈지 결정한다. 신선하고 섬유질이 많은 음식은 우리 몸에 더욱 건강한 미생물들이 번성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넷째, 항균 제품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미생물을 죽이는 것은 항생제만이 아니다. 시중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각종 항균 제품들도 그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영향을 끼친다. 항균 제품들이 과연 세간의 인식처럼 몸에도 이로운 것인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들 항균 제품들도 몸속의 유익한 미생물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항생제와 항균 제품을 남용하지 않으면서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 몸속 유익한 미생물과 공존하며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특히, 항생제 남용에 대해서는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진료 현장에서 정말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 현장의 적잖은 의사들이 환자의 감기 증세가 조금 심하다 싶으면 무분별하게 항생제를 처방한다. 환자가 항생제를 달라고 먼저 요구할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처방권이 있는 의사가 항생제 처방을 주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무척 잘못된 관행이다.

감기는 바이러스가 일으킨다. 그런데 항생제는 바이러스를 억제하지 못한다. 항생제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세균을 죽이기 때문이다. 세균성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항생제를 처방한다고 말하는 의사도 있지만, 실제로 바이러스성 감기에 세균성 감염이 겹치는 경우는 1%도 되지 않는다. 감기에 항생제를 사용하는 것은, 기대한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항생제 내성과 정상 세균총 교란의 위험만 따를 뿐이다. 항생제를 예방약처럼 쓰는 관행이 중단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암 환자 가운데 머리가 빠지고 기운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항암제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이는 항암제가 암세포뿐만 아니라 몸의 정상 세포를 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생제는 그 열 배에 해당하는 몸속의 미생물을 죽인다. 항생제도 항암제만큼이나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의 90%는 미생물이다. 뼈와 살, 피부와 장기를 이루는 세포를 모두 합쳐도 그 수는 10%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45명의 사람이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행을 간다고 해보자. 그걸 45명의 사람이 여행을 간다고 하지 버스가 여행을 간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지극히 존재론적인 질문을 마주한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마다 마주하는 것은 이제껏 우리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누군가가 아니라, 수많은 미생물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소우주인지 모른다.

이제 우리의 몸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 할 때다. 전통적인 관점의 뼈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신체만 우리 몸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동반자가 우리 몸속에 함께 하고 있다. 닫힌 사고를 벗어나 열린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의학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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