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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Mar 25. 2020

모짜르트와 고래

(사)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2019년 10월호 기고글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


도널드조쉬 하트넷 分는 발달 장애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 대인 관계에 어려움이 있지만, 특이하게도 숫자 계산에 대해서만큼은 남들이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천재성을 보인다. 예컨대, 난감한 상황에 처하면 일반인이 계산기 없이 다룰 수 없는 큰 숫자들을 순식간에 암산하고 그 결과를 조용히 독백처럼 읊조리고는 한다.


어른이 된 도널드는 비슷한 처지의 자폐증 환자들과 함께 자조 모임을 이끌어 나간다. 자조 모임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돕는 모임’을 말하는데,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모여서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만든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조 모임에서 보내는 시간조차도 순탄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숫자에 집착하다가 걸핏하면 모임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자조 모임을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각자 관심 밖의 일들에 대해서는 무척 서툰 모습을 보이며 빈번하게 충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벨라다 미첼 分이라는 여성이 이 모임에 들어온다. 그녀는 성폭력의 아픈 과거에도 불구하고 활기가 넘친다. 그녀 또한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쉽지 않다. 반면에 미술과 음악에는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는데, 도널드는 그런 그녀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도널드와 이사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온 삶을 누구보다 서로 깊이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서로가 많이 다르다는 점도 깨닫는다. 함께 간 핼러윈 축제에서 도널드는 고래로 이사벨은 모차르트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는 도널드가 그간 바닷속 고래처럼 세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조심스럽게 이어온 반면 이사벨은 모차르트처럼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독특함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온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차이점과 그 차이점에 대한 대처방식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도널드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과 이사벨이 본래 갖고 있는 아스퍼거 환자의 특징들을 거부하려고 애쓴다. 서로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사벨은 이런 도널드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결국 도널드를 떠나고 만다.


그 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사벨은 여전히 도널드가 자신의 독특한 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이르러 두 사람은 서로의 차이가 가져올 결과에 미리 주눅 들지 말고 함께 가자며 용기를 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모짜르트와 고래 Mozart and the Whale | 2005>는 1995년 10월 23일 미국 LA 타임스에 소개된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던 제리 뉴포트Jerry Newport에 관한 기사이다.(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95-10-23-mn-60262-story.html)


어느 날 그는 정신과 의사인 친구가 권해준 영화 <레인 맨>을 보게 되었다.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 주연의 1988년 작 <레인 맨>은 자폐증 환자가 나오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비로소 자신이 자폐증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후 지역의 자폐증 자조 모임에 참여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던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며 사회적 편견에 걱정할 필요가 없이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는 이들과 소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미래의 부인인 메리 메이넬Marry Meinel도 만났다. 제리는 누군가와 진실한 소통을 원했고, 그가 바라던 대로 자조 모임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작가 로널드 배스Ronald Bass는 LA 타임스에 실린 제리에 관한 기사에서 영감을 얻어 <모짜르트와 고래>의 각본을 썼다. 그런데 그는 제리가 자신의 자폐증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바로 그 영화 <레인 맨>의 각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리는 현재 아스퍼거 증후군을 이겨내고 로널드처럼 작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영화보다 더욱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이란.


아스퍼거 증후군은 1944년 오스트리아 의사 한스 아페르거Hans Asperger가 처음 발표하였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반복된 행동을 지속해서 보이거나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이 있는 질환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 또는 전반적 발달 장애의 한 유형으로 분류된다. 환자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 또는 활동분야에 행동이 제한되는 특징이 있다. 대인관계에도 흔히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점에서 자폐증과 비슷하지만, 자폐증만큼 심각한 발달장애를 보이지는 않는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뇌의 특정 부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유전적인 요인도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산 시 뇌 손상과 같은 물리적 혹은 생화학적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500명 중 1명 비율로 발생해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고, 여아보다 남아에게서 더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보통 유아기에 나타나고 학교에 입학하면서 증상이 뚜렷해진다. 공감 표현의 어려움이 가장 흔한 증상으로, 외관상 언어발달의 문제는 크게 없지만 대화할 때 제스쳐를 적게 사용하는 편이며 억양이 이상하고 부적절한 단어가 반복되기도 한다. 주변 환경의 변화를 싫어하고 동작이 서툴거나 표정을 읽기 힘든 특징도 있다. 도널드나 이사벨처럼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치료법은 따로 없지만,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거치면 사회적응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선 인지 치료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돕고, 사회기술훈련을 통해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후 잘못된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도록 행동 수정치료가 이어져야 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학습도 도움이 된다. 영화에서처럼 환자들끼리의 자조 모임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부모나 주변 사람들도 노력해야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특징에 대해 이해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조건 고집대로 다 들어주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며, 스스로 자제력을 익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상과 비정상에 관하여.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앤딩 크래딧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아름다움과 추함, 상식과 비상식,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상을 나누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닐까. 세상에 정상과 비정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면 정상이고, 이해할 수 없다면 비정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함부로 추하다고, 비상식적이라고, 어리석다고, 그래서 비정상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설사 그들이 아스퍼거 증후군, 혹은 또 다른 장애를 갖고 있더라도 그렇다. 그들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일 뿐이니 말이다. 이것은 또한 장애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과 다른 세대, 성별, 정치 성향, 종교, 직업, 사회 경제적 수준에 속한 이들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알지 못하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을 비난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걸 널리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세상에 비정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 안의 편견일 것이다.


이 글은 (사)한국건강관리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건강소식> 2019년 10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실제 발행 내용은 매체 자체의 편집 방향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외과 의사이자 블로거로 활동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건강, 의료, 의학 칼럼의 기고 의뢰를 받고 있습니다. 본 브런치의 제안하기나 여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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