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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록

노인과 바다

by 신승건의 서재


작년 말이었다. 아내가 직장인 은행에서 싱가포르에 3년간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어렵게 얻은 기회라고 했다. 나는 잘되었다고 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기간을 어떻게 하면 뜻깊게 보낼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이참에 초등학생인 딸도 싱가포르 국제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우리 인생에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 하나가 떠올랐다. ‘그럼 나는? 같이 가야 하나?’ 선뜻 답을 내기 어려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보건소장 역할에 겨우 막 적응해가던 무렵이었다. 동료들도 좋고 일도 재밌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것대로 아찔했다. 일을 쉬어야 할까. 4년 전에 아내가 1년간 영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도, 어렵사리 얻은 과장 보직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따라갔던 내가 아닌가. 내가 가지 않는다면 장모님이 따라가야 할 텐데,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얼마나 고역일까.


하지만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하니 마냥 떠날 일이 아니었다. 런던에서의 1년이야 주변에 내가 좋아하는 박물관도 많고 기간도 1년이었으니 괜찮았다만, 부산보다도 작은 싱가포르에서 3년 동안 백수로 지내는 걸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나는 그 무료함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오래전 아버지가 시골집에 진돗개 한 마리를 홀로 산을 바라보게 묶어두고 다녔더니, 얼마 안 가서 명석하던 개가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쉬면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도 사라지니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시간은 흘러 2025년 달력이 벽에 걸렸다. 아내와 딸과 장모님은 싱가포르로 떠났고, 나는 부산에 홀로 남았다. 2025년부터 2027년까지 3년 동안. 현실로 부닥치고 나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다. 무엇보다도 퇴근하고 인기척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게 가장 괴롭다. 나는 결혼했고 아이도 있는데, 지금 왜 내 옆에는 아무도 없는가. 매일 아침과 저녁 화상전화로 아내와 딸아이를 만나지만, 화면이 꺼지면 마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마냥 등 뒤에서 적막감이 덮쳐온다. 내가 무엇을 위해 혼자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씁쓸한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름의 대안을 마련하였다. 한 달에 한 번은 싱가포르에 가겠다는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아이는 자라고 나와 아내는 나이를 먹어간다.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 띄엄띄엄으로나마 추억을 남겨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앞섰다. 현재까지는 어렵사리 지켜가고 있다. 직장의 구성원들, 위로는 구청장부터 옆으로는 보건소 동료들까지, 이들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해 준 덕이다. 집을 떠나 나 대신 손녀를 돌보기 위해 따라나선 장모님의 희생도 빠뜨릴 수 없다. 내가 살면서 천천히 갚아나가야 할 마음의 빚이 쌓여간다.


나는 지금 부산에서 싱가포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방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 겹유리로 만들어진 창밖을 내다보니 절묘하게도 망망대해가 수평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무척 단순하다. 한 늙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갔다가, 사흘 동안 고생한 끝에 큰 청새치를 잡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가 달려들어서 생선 뼈만 갖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소설이 시간이 흘러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산티아고가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하였을 때의 기쁨. 그러면서도 소년이 옆에 없음을 아쉬워하는 마음.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에게 뜯긴 생선 뼈를 거두며, 마땅히 느껴야 할 허무함보다는 오히려 성취감에 더 가까웠을 법한 그 심정.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나를 대입시키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것이 왠지 소설을 읽는 방법으로는 너무 제한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삶에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가족과 함께하는 남편이자 아빠로서의 모범적인 역할인가. 직장에서 좋은 동료로 인정받는 것인가. 혹시 내가 바라는 것은 남들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받는 게 아니었나. 가만. 그런 것들이 산티아고가 잡아서 묶어두었던 청새치의 살점과 다를 게 무언가. 결국은 상어에게 뜯겨버리듯 사라져버릴, 설령 그런다고 해도 내 삶을 부정할 이유가 되지는 않을, 그런 부질없는 것들 아닌가.


‘내가 삶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틀렸다. 삶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 아내의 주재원 발령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니 그 또한 나의 행복이어야 한다. 책임감 있는 아빠가 되기 위해 매달 딸을 만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게 아니라, 딸을 만나는 것 그 자체가 소중한 시간이어야 한다.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주변 동료들과 잘 지내고 주어진 일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는 그 과정에서 만족을 느껴야 한다. 아니, 그것조차 틀렸다. 어찌어찌 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어야 옳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타인을 향한 마음을 굳이 부정할 것도 아니다. 노인이 소년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심지어는 자신이 잡아 죽인 청새치에게 동류의식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결국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세상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남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애쓰는 마음을 그저 부질없는 감정으로 치부할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것도 우리 삶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죽음에 이를 게 분명한데도, 왜 나는 매 순간 더 뜻깊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가. 뜻깊게 산다고 할 때 그 뜻이란 게 무엇일까. 그런 게 실제로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우리 삶의 의미는 뜻 같은 것보다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그 여정에 있는 건 아닐까.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충분한 것. 그것으로 된 것. 일찍이 소설의 비평가들이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산티아고의 삶에는 시지프스적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다.


『노인과 바다』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 수많은 이들로부터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읽은 민음사 번역본에도 번역가의 해제가 상당 분량 이어졌다. 내가 그보다 더 나은 해석을 할 역량도 되지 않고 그것은 내가 할 일도 아니다. 그보다는,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고 오히려 독자들마다 재해석되는 고전들이 그러하듯, 내가 이 책을 읽은 뒤 내 삶을 돌아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마땅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나도 이 소설을 읽고 나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지금 혹시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살고 있는지, 아니면 부질없는 허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은 아닌지. 타인에게 보여주는 삶에 염증을 느끼거나, 혹은 역으로 ‘그래, 나 말고는 아무 의미 없다’는 편협한 반발심으로 기운 것은 아닌지. 독자들도 산티아고의 사흘간의 사투를 지켜보며 남이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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