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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록

초가공식품, 음식이 아닌 음식에 중독되다

by 신승건의 서재

나는 어릴 적부터 한 가지 습관이 있었다. 이 습관을 부를 만한 적당한 명칭이 떠오르지 않는데, 일단 ‘문자 중독’이라고 해두자. 나는 주변에 글자가 보이면 무엇이든 일단 읽고 보았다. 특히 간식을 먹을 때 손에서 읽을거리를 놓지 않았다. 책이나 신문처럼 애초에 읽어주길 바라고 쓰인 것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트에서 산 과자를 먹을 때에도 포장지의 알록달록한 홍보문구를 음미한 뒤 뒷면의 성분표까지 꼼꼼히 읽곤 했다. 요즘 혼밥하는 이들이 유튜브로 먹방을 보는 심리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다만 그 대상이 글자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포장지 뒤를 읽다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생소한 용어들에 멈칫하곤 했다. 아질산나트륨, 인산나트륨, 소르빈산칼륨처럼 실험실 선반에 놓여 있을 법한 화학물질부터, 팜유처럼 그게 뭔지는 짐작하지만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식재료들까지 다양했다. 유화제, 팽창제, 산화방지제 등은 그 기능이 이름에 드러나지만, 왜 그런 것이 들어갔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구아검, 잔탄검, 아라비아검 등도 자주 보였는데, ‘설마 여기에 씹는 ‘껌’이 들어 있다는 뜻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성분들은 대체 무엇일까? 왜 이걸 이 음식에 넣었을까? 먹을 만하니까 넣었겠지? 어린 시절 과자를 우물거리며 포장지 뒷면을 읽을 때마다 품었던 오래된 궁금증이었다.


영국 런던의 UCLH 소속 의사이자 과학자인 크리스 반 툴레켄(Chris van Tulleken)의 책 『초가공식품, 음식이 아닌 음식에 중독되다 (Ultra-Processed People: Why Do We All Eat Stuff That Isn’t Food… and Why Can’t We Stop?)』 덕분에 그 오랜 의문이 풀릴 수 있었다. 이 책은 “우리가 먹는 것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신체와 뇌, 나아가 지구에 해를 끼치는 화학적 혼합물이다”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초가공식품(ultra-processed food)의 생산 과정, 첨가물, 중독성, 그리고 사회·환경적 영향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며 현대 산업 식품 구조의 본질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그는 책 초입부에서 독자들에게 평소 먹던 초가공식품을 끊지 말고 그대로 유지하라고 권한다. 그래야 책의 내용이 초가공식품에 대한 거부감(더 정확히는 역겨움)을 극대화해, 책을 다 읽고 난 뒤 자연스럽게 초가공식품에 대한 의존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담이지만, 그가 일하는 곳이 UCLH라는 점이 내게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3년 전 영국에 살 때 내가 복용 중인 와파린의 약효인 PT INR을 확인하기 위해 매달 방문하던 병원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1906년에 지어져 빅토리아 시대의 붉은 벽돌과 테라코타 장식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UCL 십자형 본관(크루시폼 빌딩, Cruciform Building)과, 그 옆의 현대식 UCLH 건물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건축물이다. 흔히 영국의 의료 시스템을 이야기할 때 무료이지만 끝없이 기다려야 한다고들 말한다. 나 또한 영국에 가기 전에는 그런 편견을 가졌고, 내 병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하지만 실제로 1년간 살아보며 심장 상태와 투약량을 관리하는 데 있어 조금의 미흡함도 없었다. 직접 경험해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툴레켄 역시 직접 경험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실험 도구 삼아 4주간 80%가 초가공식품으로 이루어진 식단을 유지하며 신체적·정신적 변화를 생생히 기록했다. 체중 증가, 염증 수치 상승, 뇌의 중독 반응 등이 관찰된 이 실험은 초가공식품이 단순한 식품을 넘어 우리 몸과 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체험적 증거는 그가 업계 관계자와 학자들을 인터뷰한 내용과 결합해 더욱 설득력 있는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그는 초가공식품 산업이 단순히 건강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구조와도 맞닿아 있음을 짚으며,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화학적 설계와 소비자 조작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한다.


이 책은 2021년 영국 B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What Are We Feeding Our Kids?』(직역하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이고 있는가?’)를 바탕으로 한다. 다큐멘터리가 큰 반향을 일으킨 뒤, 저자는 그 경험과 연구를 체계화하여 『초가공식품, 음식이 아닌 음식에 중독되다』를 출간했다. 이후 다큐멘터리와 책은 서로를 보완하며 초가공식품이 건강과 사회에 끼치는 심각한 영향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참고로 같은 해 한국에서도 이 다큐멘터리가 KBS1에서 『아이들의 식탁이 위험하다』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으나, 현재 유튜브나 KBS 홈페이지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전체 영상을 볼 수 없다. 혹시 합법적인 시청 경로를 아는 독자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면 좋겠다. 아내와 딸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20여 년 전 의대생 시절 접했던 에릭 슐로서(Eric Schlosser)의 『패스트푸드 네이션(Fast Food Nation)』과 모건 스퍼록(Morgan Spurlock)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퍼 사이즈 미(Super Size Me)』가 떠올랐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매체를 택했지만 ‘패스트푸드 산업의 문제점’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었다. 슐로서는 저널리스트로서 산업의 실태를 심층 취재했고, 스퍼록은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파격적 방식을 택했다. 툴레켄은 이 둘의 장점을 절묘하게 결합해 초가공식품 문제를 입체적으로 풀어냈다.


책의 메시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초가공식품은 ‘음식’이 아니라 ‘산업공학적 제품’이다. 툴레켄은 초가공식품을 “먹을 수 있는 물질”로 규정하며, 그것이 영양 공급을 위한 음식이 아니라 유통기한 연장과 생산비 절감, 소비자 중독을 목표로 설계된 산업적 산물임을 밝힌다. 이러한 식품은 인공첨가물과 향미증강제로 우리의 감각을 속이며, 실제로는 포만감을 방해하고 과식을 유도한다. 즉, 초가공식품은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먹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둘째, 초가공식품은 뇌와 식욕을 교란시켜 ‘조절 불가능한 소비’를 유도한다. 그는 초가공식품이 뇌의 보상 시스템을 해킹해 중독성(reward addiction) 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같은 칼로리를 섭취하더라도 초가공식품을 먹은 사람들은 비가공식품을 먹은 사람보다 평균 500kcal 이상 더 섭취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개인의 의지나 운동 부족 때문이 아니라, 공학적으로 설계된 식품이 우리의 생리적 조절 메커니즘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셋째, 문제의 본질은 개인이 아니라 산업 구조에 있다. 툴레켄은 비만과 건강 악화를 개인의 선택 실패가 아닌 사회적 실패로 본다. 초가공식품 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과 저가 전략으로 소비자 행동을 설계하고, 주주의 이익을 소비자의 건강보다 우선시한다. 그는 식습관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정책적 규제와 사회적 각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가공식품의 문제는 단순한 건강 이슈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산업이 조작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요컨대 『초가공식품, 음식이 아닌 음식에 중독되다』는 초가공식품의 위험성과 산업 구조의 문제를 고발하며 건강한 식생활을 촉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 초가공식품이 신체와 뇌의 식욕 조절 메커니즘을 교란시킨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는 개인의 의지에 맡기지 말고 정책적 규제와 사회적 각성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평소 건강한 식습관에 관심이 많거나 가족의 식단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영양학·보건학·사회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나 식품 산업과 공중보건 정책에 관여하는 실무자에게도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난 뒤, 딸과 함께 즐겨 먹던 하리보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책을 다 읽어갈 무렵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자는 학계와 식품 산업의 유착을 여러 차례 경고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두 집단의 이해관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예컨대 초가공식품 관련 논문 제목을 입력하면, 저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기업 목록이 뜨는 식이다. 더 나아가 대중을 위한 기사도 입력하면 관련 기업과의 관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이런 투명한 정보 공개만으로도 왜곡된 연구와 편향된 정보의 확산을 막는 방어선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기업의 돈을 택한 학자는 학자로서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책의 초입부에서 저자가 권한 대로 나 역시 초가공식품을 평소처럼 유지했다. 과연 저자가 예고한 대로 초가공식품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거북한 감정이 쌓이기 시작했다. 책이 중반을 넘어설 즈음,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이 초가공식품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마다 챗GPT에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로써 음식이 아닌 음식, 초가공식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극명하게 달라졌다. 이제 내가 느낀 것을 당신도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c%b4%88%ea%b0%80%ea%b3%b5%ec%8b%9d%ed%92%88-%ec%9d%8c%ec%8b%9d%ec%9d%b4-%ec%95%84%eb%8b%8c-%ec%9d%8c%ec%8b%9d%ec%97%90-%ec%a4%91%eb%8f%85%eb%90%98%eb%8b%a4/ | 신승건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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