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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록

AI의 역사

by 신승건의 서재

요즘은 어디서든 AI가 화제의 중심이다. “챗GPT가 나보다 글을 잘 쓰더라.” “요즘 구글 인공지능은 영상도 만든다더라.” “이러다 정말 일자리 다 사라지는 거 아니냐.” 감탄과 불안이 뒤섞인 대화는 이제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AI’란 영화 속 상상이나 전자제품의 과장된 광고 문구에나 등장하던 말이었다. 한때 보건소에서 ‘AI’라 하면 조류 인플루엔자를 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주변에서도 AI가 인공지능을 가리킨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AI가 처음 내 기억 속에 강하게 각인된 순간은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던 날이었다. 외과 레지던트 시절, 동료들과 의국 컴퓨터로 유튜브 생중계를 지켜보던 그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섬광 기억(flashbulb memory)’이라 부른다. 충격적인 사건을 접했을 때,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까지 또렷이 기억에 남는 현상이다. 내게 알파고의 승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섬광은 2022년 말, 육아휴직을 마치고 부산시청 역학조사관으로 근무하던 때 찾아왔다. 현장에서 식중독 조사를 하던 어느 날, PC 화면에 챗GPT를 띄워본 그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AI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이미 내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존재라는 사실을.


인공지능은 이제 생활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아침 출근길에는 뉴스를 요약해주고, 회의 전에는 보고서 문장을 다듬어준다. 요즘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검색창보다 AI에게 묻는 일이 자연스럽다. 내가 가진 재료에 맞춘 요리법을 알려주고 다음 달 여행 일정도 세밀하게 짜준다. 아이가 챗GPT 스터디 모드에서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그것은 선생님처럼 답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이 탐구하도록 이끈다. 미디어에서는 AI로 만든 영상이나 그림이 실제 수입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기술이 편리함을 주는 건 분명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는 때로 두렵게 느껴진다. 세상은 AI가 “앞으로 얼마나 빠르게 발전할 것인가”를 말하지만, 그 말 속에는 이미 “얼마나 빠르게 변해버렸는가”라는 뜻이 함께 숨어 있다. 속도는 지나온 거리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모른다면 지금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담론 속에서 무언가 빠져 있는 건 아닌가. 혹시 백미러 없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이 미래만 바라보며 질주하는 동안 그 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잊어버린 듯했다.


그러던 중 서점에서 『AI의 역사: 여섯 가지 키워드로 읽는 AI의 모든 것(The Shortest History of AI)』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라는 단어의 익숙함 때문일까, 나는 자연스레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영어 원제에서 암시하듯 짧지만 밀도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AI의 미래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과거의 궤적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이보다 명확히 드러내기도 어렵다. 그렇게 나는 지나온 길을 비추기 위해 백미러를 만지작거리듯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저자 토비 월시(Toby Walsh)는 인공지능을 과학의 영역에만 가두지 않고, 그 흐름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통찰해온 대표적 학자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 교수이자 세계 AI 연구 네트워크의 중추적 인물로, 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와 사회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왔는지를 꾸준히 탐구해왔다. 냉철한 분석과 균형 잡힌 시각으로 AI의 현재를 비판적으로 조망하면서도 그 가능성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AI의 역사』는 월시가 반세기에 걸친 인공지능의 궤적을 하나의 서사로 엮은 책이다. 서두의 연표는 전체 구성을 관통하는 지적 지도를 제시한다. 인류가 지능의 본질을 상상하던 ‘선사시대’를 서문처럼 배치하고, 1956년 다트머스 워크숍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AI 연구의 역사가 열리는 ‘기호의 시대(symbolic era)’를 첫 장으로 삼는다. 이후 ‘학습의 시대(learning era)’, ‘생성형 AI의 시대(generative era)’,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뒤를 잇는다.


본문은 세 개의 주요 장으로 구성된다. ‘기호의 시대’에서는 인공지능이 논리와 규칙으로 사고를 재현하려 했던 초기의 시도를 다루며, 이를 ‘해답을 탐색하기’, ‘최고의 수를 두기’, ‘규칙을 따르기’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세분화한다. 이 장은 인간의 이성과 계산 능력을 모사하려는 초기 AI의 한계와 야심을 함께 보여준다. 이어지는 ‘학습의 시대’는 ‘인공두뇌에 관하여’, ‘성공에 대한 보상’, ‘믿음에 대한 추론’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기계가 스스로 데이터를 해석하고 학습하는 단계로의 전환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미래’ 장에서는 ‘생성형 AI의 시대’를 중심으로 기술이 인간의 창조 능력에 근접하면서 불러온 새로운 질문들을 제시한다.


이 책의 핵심은 AI의 발전을 기술사로만 다루지 않고, ‘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떻게 재정의되어왔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다. 1956년 다트머스의 작은 회의실에서 열린 여름 워크숍에서 시작된 논의는, 오늘날 인간의 언어와 상상력을 학습하는 거대한 신경망으로 확장되었다. 월시는 그 변화의 과정을 연대기처럼 기록하면서도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지성의 욕망과 두려움을 세밀하게 읽어낸다. 『AI의 역사』는 인공지능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서이자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긴 여정의 기록이다.


이제 AI는 그림과 글, 업무와 학습까지 바꾸어놓았다. 변화가 너무 빠른 탓에 정작 우리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다. 『AI의 역사』는 그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잡게 해주는 책이다. 기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되짚어보면 지금의 풍경이 전혀 우연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세부 기술을 몰라도 괜찮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 뉴스의 제목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 기술의 변화를 두려움보다 이해로 마주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AI의 역사』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늘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미래를 얼마나 예견할 수 있었던가. 5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챗GPT가 우리의 일상 속 대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이라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5년 뒤의 모습 중에 우리가 지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기술의 진보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며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어놓는다.


역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그 안에서 앞으로의 길을 준비할 지혜를 준다. 그렇기에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더라도 미래를 단정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토비 월시의 『AI의 역사』는 그 준비를 위한 작은 이정표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예언이 아니라 성찰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이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역사를 통해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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