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예전만큼 글을 쓰지 않고 있다. 이 블로그에 가끔 올리는 글들이라고는 매체에서 의뢰받은 글이나, 그보다 더 긴 간격을 두고 올리는 서평뿐이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그라든 건 아니다. 때때로 글을 써야겠다고 불쑥불쑥 마음이 동할 때도 있다. 저녁을 먹은 후 아파트 단지 뒤편의 호수공원을 돌 때,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서 잠이 오기를 기다릴 때, 그럴 때는 불현듯 글로 옮기고 싶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좀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쓰고 싶다’에만 머물고 ‘쓴다’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한 주가 지나버리고 금요일 저녁 퇴근 무렵에 이른다. 금요일 퇴근길에 운전대를 잡고 이번 주말에는 뭐라도 써보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 다짐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벌써 일요일 밤이 되어 버린다. 뭔가를 새로 쓰기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월요일 아침을 명료한 정신으로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불을 끄고 자야 한다. 그럼 스스로 설득한다. 주말에 잘 쉬었으니 주중에 퇴근하고 써보자. 하지만 이것은 설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변명이다. 꼬리를 물고 도는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미루기와 후회하기가 번갈아 가며 이어진다.
분명한 한 가지. 글쓰기가 어렵게 된 것이 환경 탓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떠올리면 지금의 업무량은 결코 과하지 않다. 직장에서는 선량한 동료들이 자기의 맡은 바 일들을 책임감 있게 해내고 있다. 윗사람들도 내가 지금껏 함께 일해 온 그 누구보다 상식적이고 인간적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이 일, 돈에 연연하지 않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이 직업에서도 보람을 느낀다. 훗날 지금 이 시기를 돌아보면 과연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런 호사 속에서도 글은 써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장 글을 열심히 썼던 시기는 10여 년 전 국립중앙의료원 외과 전공의 시절이었다. 그때는 지금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훨씬 고달펐다. 잠을 잘 시간이 부족해서 머릿속은 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환자의 생사가 오가는 극도로 긴장된 환경 속에서 병원의 구성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무정하고 가혹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거의 매 시간마다 당장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나오고 싶었던 순간이 쳇바퀴 돌 듯 이어졌다. 그때 나는 일주일에 서평을 두 편씩이나 써 내려갔다. 어쩌면 그 당시 척박했던 주변 환경이 글을 쓰는 데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연료로 쓰였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반면에 지금은 편안하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지적 자극이 될 만한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상황 분석이 아니다. 지금의 나에게 글을 쓸 소재가 모자라지는 않다. 내가 일하고 있는 보건소라는 공간이 외부에서 보면 정해진 일을 하는 지루한 곳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분초를 다투며 구급차가 들어오는 응급실이나, 공간 내의 모든 이가 날카롭게 긴장하고 냉방으로 공기마저 차가운 수술실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이곳도 사람이 모여 일하는 곳이다 보니 여느 직장처럼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때때로 업무가 몰리면 스트레스를 받고, 세대 간의 차이에서 오는 미묘한 정서의 어긋남도 있으며, 일을 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실수로 민원인들에게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한다. 그런 일상 속에서 싹트는 생각들도 글로 남길 가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아내와 딸이 머무는 싱가포르에 오간다. 한국에만 있었다면 미처 보지 못했을 세상살이의 다양한 면들도 발견한다. 그런 것들도 좋은 글감이 될 만하다.
그런데 왜 그럴까. 글을 쓸 시간과 환경이 주어졌고, 쓸 이야기도 많은데 나는 왜 선뜻 글을 쓸 수 없는가.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10년 전과 지금의 차이는 무엇인가. 간만에 다른 약속이 없는 일요일 오전, 그 이유를 차분히 돌아본다. 생각은 결국 몇 가지 지점으로 모인다.
먼저, 이제 나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인식한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도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친분과 인연을 통해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내가 최근에 올린 글을 읽었다며 인사를 건넨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나름의 친근함을 표하는 안부 인사였으리라. 아니면 별다른 생각 없이 오늘 인터넷에서 무슨 뉴스를 봤다는 정도의 무게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의 글을 읽고 언급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10년 전 이 블로그를 처음 만들고 글을 썼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만의 생각을 고요히 정리하고, 나와 아무 접점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끔 눈에 띄는 정도의 노출만 있었다. 나와 전혀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을 독자로 두고 글을 쓰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 나의 생각을 가감 없이 펼칠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다. 그것은 인턴, 레지던트의 텁텁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블로그는 누구에게나 공개된 공간이므로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가족 중에, 그리고 직장 동료 중에서 누군가가 내 블로그를 탐독하고 있다는 건 사뭇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를 아는 이들이 나의 블로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내가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들을 날것 그대로 꺼내기가 망설여진다.
특히 직장에서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있다는 게 부담스러운 이유는 예전과는 다른 나의 역할 때문일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 나는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하는 입장이었다.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불만을 글로 해소했다. 대개는 뭐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설익은 글이었지만, 어쨌든 쓰고 나면 개운했다. 그것만으로도 그 글을 쓴 목적은 달성되었다. 글마다 댓글도 많았던 걸로 보면 독자들도 뭔가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백여 명이 넘는 직원들을 데리고 일을 한다. 글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자리다. 글만 번지르르 하고 행동거지가 형편없다면 경멸의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설령 행동에 자신이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난 후 그 결과까지 문제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상일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섣불리 옳고 그름에 관하여 글을 쓰는 게 두렵다.
두 번째 이유는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글에 대한 회의감이다. 글은 인류가 만들어낸 위대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생각이 머릿속에서 언어로 정리되고, 그것이 다시 활자가 되어 기록된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을 시각을 통해 인식하고, 그들의 중추신경계 안에서 다시 언어로 바뀐 뒤 의미가 해석된다. 그 과정에서 누수와 왜곡은 불가피하다.
물론 문학은 인류가 상상력을 담아낸 모든 예술의 뿌리이자 정수이고, 역사를 통해 수많은 작가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왔다. 글이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한계가 있다는 나의 생각은, 어쩌면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미숙한 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력의 문제를 떠나서 그 우려에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나의 원래 생각이 아니라, 글에 담기 위해 변형되고 가공된 생각이 마치 진짜 나의 생각인 것처럼 기록되고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달된 글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의도와 다른 의미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내가 자전적 에세이를 내면서 직접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나는 심장병 환자로 살아오며 겪었던 일들을 글로 기록했고, 그것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을 낸 일차적 목적은 내 딸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책을 내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그것이 가진 한계를 깨달았다. 나의 생각이 책을 통해 딸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아니, 맨 처음 내가 글을 써 내려간 순간 내가 가졌던 생각이 글에 온전히 옮겨지기는 한 것일까.
만약 내가 구축한 고유한 생각이 글이나 언어를 거치지 않고, 더 본질적인 데이터의 형태로 저장되고 전달될 수 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데이터를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을 과연 나의 생각이라 부를 수 있는지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사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곧 언어인 것은 아니다. 모성애에서부터 자전거를 탈 때의 균형 감각에 이르기까지, 언어에 온전히 담기 어려운 생각들이 있다. 생각이 언어에 의존하든 그렇지 않든, 데이터를 직접 저장하고 전달할 수 있다면 그 과업은 글을 활용했을 때보다 더 완전하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만 확립된다면, 생각의 전달이라는 목적을 위해 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도구적 목적에서 글을 쓰기 위한 훈련 역시 필요 없어질 것이다.
몇 년 사이 인공지능이 천막 안의 낙타 머리처럼 우리의 일상으로 성큼 들어온 모습을 보면, 그것이 결코 공상의 영역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인공지능의 등장은 내가 글쓰기를 망설이게 되는 세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인간의 글에 담긴 저작물로서의 가치가 소멸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인공지능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일상 속에 스며드는 광경을 목도했다. 더구나 지금이 인공지능 시대의 초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망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변화를 상상력으로도 담아내기 버거울 정도다. 이제 아무리 글쓰기를 단련하고 실력을 키운다고 해도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그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예상이라기보다 차라리 예정된 수순에 가깝다.
인공지능의 글쓰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간의 영역을 잠식할 것이다. 먼저 글의 질이다. 인공지능이 쓴 글은 그 하나하나가 가상의 공간에서 인간은 따라갈 수 없는 규모의 수많은 훈련을 거친 결과물이다. 결국 인공지능은 질적인 면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인간의 실력을 뛰어넘을 것이고, 그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은 양적인 측면에서도 인간을 압도한다.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쏟아낸 온갖 글들이 인간의 읽을거리를 모두 잠식할 것이다. 질과 양, 그 어느 측면으로도 인간인 내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는 건 비관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그렇게 대량 생산된 저작물들 가운데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쓴 나의 글 하나는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나의 글은 그것이 있기 전과 후의 세상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는 인공지능이 무한대의 생산성으로 글을 쏟아내기 때문에 나의 글이 그 속에 묻혀버릴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끝나지 않는다. 글의 완성도나 기교에 관한 문제만도 아니다. 인간이 쓴 글이 지닌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한 권한으로서 작동해 온 저작권의 해체로 이어진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저작권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글을 쓰고 그것을 공공재처럼 활용할 수 있다면, 과연 앞으로 글을 쓴다는 게 의미 있는 지적 활동으로 남아 있게 될까. 인공지능이 작성하는 글보다 더 가치 있는 글을 인간이 쓸 수 없고, 인공지능이 쓴 글은 독점적인 가치가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권리를 논할 이유가 있을까.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일에 애써 시간과 정신을 투입할 이유가 있을까. 글을 쓸 이유가 있을까. 선뜻 답하기 어렵다.
내가 요즘 글을 쓰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정리해 보았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나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글을 쓰는 환경이나 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나 자신에 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과정은 글 쓰는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나는 다시 글을 쓸 것이다. 글쓰기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이전에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쓰는 시간이 좋았지만, 이제는 내가 아는 이들이 내 글을 읽어준다는 사실 자체가 고맙게 느껴진다. 가족과 친구가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진솔하게 쓸 수 있다면, 그 글은 더 이상 혼잣말에 머물지 않고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글이 나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글은 쓰이는 순간을 벗어나는 즉시, 더 이상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어떻게 읽히고,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지만, 쓰는 순간의 집중과 몰입만큼은 분명히 나의 경험으로 남는다. 그래서 글을 쓴 이후보다, 쓰고 있는 지금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인공지능은 나보다 더 많은 글을, 더 능숙하게 써낼 것이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해도 괜찮다. 나는 여전히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시키는 글을 쓰지만,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 그것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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