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11개월

상처를 피하려 애썼던 그 모든 밤들

by 신수현

오늘, 나는 잿빛 모니터 불빛 아래 내 인생을 숫자로 환산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리멤버’라는 플랫폼에 내 경력을 입력하려 건강보험 가입 기록을 불러내자, 1990년 가을부터 시작된 내 노동의 흔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일기장을 다시 펼친 듯, 혹은 말라붙은 땀과 눈물의 껍질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총 24년의 경력. 그 안에는 유학도, 달콤한 안식년도, 누군가가 누리는 축복 같은 육아 휴직도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가 다시 밀려 들어온 실직과 이직의 시간들만이, 내가 원하지 않았던 숨 고르기로 존재했을 뿐이었다. 화면 속 숫자들이 나를 응시했다. 그 숫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얼룩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근무기간 11개월.’

우연이라기엔 너무 자주 반복되는, 저주 같기도 하고 필연적인 마침표 같기도 한 숫자.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멈춰버린 삶의 조각들...


누군가는 무심히 묻는다. “한 달만 더 버텼으면 퇴직금이 나오지 않느냐?” 그 피 같은 돈을 눈앞에 두고 왜 발길을 돌렸느냐고. 그 말들은 송곳처럼 내 가슴에 깊게 박혔다. 퇴직금, 그 세 글자가 상징하는 안온한 보상을 나라고 몰랐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한 달을 채우는 것이 마치 끓는 물속에서 1분을 더 버티라는 잔인한 주문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직장 생활이든, 신앙생활이든, 나는 늘 어떤 임계점에서 무너졌다. 한 계단만 더 오르면 평지가 나올 것을 알면서도, 그 마지막 한 단에 발을 올릴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다시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와야 했던 시간들. 유명 강사는 숨이 턱에 차올랐을 때 ‘한 번 더’를 외쳐야 진짜 운동이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이미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 써버린 사람에게 그 ‘한 번 더’는 어디서 빌려와야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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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멈춘듯, 흐르지 않는 어둠과 함께 ... 시간에 대한 후회, 반복되는 상처로 인해 글은 저의 치료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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