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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과 자폐

by 날큐
* 나르시시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 또는 자기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일.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

* 자폐
1~2세 무렵부터 나타나는 발달 장애.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없으며,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하고 대인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아내와는 연애 10년, 결혼 13년, 도합 23년을 알고 지낸 사이다. 얼마 전 생일이 지나며 마흔여섯이 되었으니 인생의 반을 그녀와 함께 한 셈이다. 아내와 나는 대학에서 만났다. 나이는 내가 두 살 위였지만 사수를 한 탓에 첫 호칭은 '선배'였다. 선배는 나를 신기해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토록 멋진 사람과 만날 수 있었는지를 놀라워했고, 콩깍지가 제대로 씐 연애초기를 지나서는 사람이 어떻게 렇게 매사 자신만만한지를, 나아가 이런 단단한 자존감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따위를 궁금해했다. 당시 아내가 한 말이 있다. "오빠는 아프리카 한가운데 떨어뜨려놔도 추장 하면서 잘 살 사람이야!" 결혼 후 나에 대한 호기심은 약간 변질되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자기밖에 모를 수 있지?', '내가 어쩌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주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지?' 뉘앙스가 좀 바뀌기는 했지만 나는 만족한다. 이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 사이 궁금한 것만 바뀐 것은 아니다. 아내는 패션에디터 생활을 거쳐 다시 한번 대학에 입학했고 지금은 한의사로 일하고 있다. 의료인이 되고 나서는 나에 대한 호기심도 학문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아내의 론은 '나르시시스트'다. 내가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을 할 때 나는 바로 대답을 못하고 입고리만 씰룩거렸다고 한다. 그녀는 이를 암묵적인 동의로 간주하고 있다. 평소 나는 우겼던 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거나,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할 때 특유의 표정과 함께 오른쪽 입고리를 미세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가 끝난 후 곧바로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으로 구글링을 해보았다. 그리고 피하기 어려운 진실과 대면할 수 있었다. 몇몇 문항을 제외하고는 흡사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고 나서 쓴 듯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과장된 자기 중요성, 과대망상- 좋게 말해 큰 포부 -, 공감 능력 부족, 끊임없는 인정에 대한 욕구 등 부정하기 어려운 특징들이 나열돼 있었다. 그나마 아니라고 우겨볼 수 있는 건 성공을 위한 착취적인 행동과 시기심 정도였다. 그것도 그리 자신 있지는 않았다.


나르시시스트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것은 '아스퍼거 증후군'이었다. 평소 내 상식 수준을 감안했을 때 당연히 몰랐어야 할 의학 용어였지만 마침 일론 머스크를 다룬 평전을 읽은 터라 단박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땐 조목조목 반박하며 간신히 아스퍼거 증후군이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으나 싱크로율이 좀 떨어질 뿐 내가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전문적으로 더 깊게 들어가면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아스퍼거 증후군은 나르시시즘의 강화 버전쯤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나는 나르시시즘과 아스퍼거 증후군 사이 어딘가에 있는,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이며 망상에 가까운 포부를 가진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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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삶을 연구하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자칭 나르시시스트. 발달장애를 가진 딸과 함께하기 시작한 이래로 인생을 새롭게 배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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