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불안과 강박이 심해 정신과 의사가 약물을 권했지만, 예민한 촉수를 잃을까 봐 끝내 약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예민함이야말로 자신을 예술가로 만드는 근원이자,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진실을 포착해내는 감각의 안테나라 여긴다.
이것은 단지 봉준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말한다.
그들이 세상을 감지하는 방식은 남들과 다르며, 그 민감성은 때로 고통이며 동시에 무기라고.
강박과 불안은 일반적으로 병리로 간주된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그것은 병이 아닌, 비정상적으로 고해상도인 감각 체계일 수 있다.
그들은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벽지의 균열, 사람의 숨소리, 타인의 눈빛 속 미세한 떨림.
이러한 민감성은 불안의 정체이며, 동시에 창작의 재료다.
프란츠 카프카는 온갖 신체적 불편과 사회적 고립 속에서 문학을 썼다.
반 고흐는 정신질환과 강박 속에서 태양을 그렸다.
이들은 자신의 불안이라는 낡은 라디오로 세상의 숨소리를 잡아냈다.
예술가는 자아를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취약한 내면을 해부하고, 확대하고, 다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해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강박과 불안이다.
그것은 “충분히 완벽한가?”, “이걸 진짜로 이해했는가?“라는 끊임없는 자문에서 나온다.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한 ‘예민한 촉수’란, 결국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감지해내는 심리적 레이더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불안과 강박을 완화하는 약물은 존재하지만, 예술가의 감정도 함께 무디게 만든다.
세상을 너무 선명하게 본 사람들, 감각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정신과 약과 예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봉준호처럼, 어떤 예술가들은 감각의 고통을 감수한다.
그 고통은 그들의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약 대신, 세상의 왜곡을 투과할 수 있는 필터가 되기를 택한다.
예술은 안정된 정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 강박, 예민함이란 이름의 내면적 진동 속에서 만들어진다.
예술가는 그 진동을 조율하여, 세상의 잡음을 진실로 바꾼다.
그러므로 예술에 있어 불안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들어야 할 소리이며,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견뎌야 할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