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정답의 사회다.
입시도, 면접도, 인생조차도 마치 어떤 정답이 존재하는 듯 짜여 있다.
틀린 말을 하면 낙오자가 되고, 다른 방향을 가리키면 문제아가 된다.
하지만 이 사회는 동시에 ‘천재’를 원한다.
혁신을 외치고,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답을 외워 온 사람에게 상상력은 없다.
상상은 오답을 견디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무엇보다 자유롭게 실패할 권리에서 시작된다.
“이게 정답일까?”를 넘어서, “이건 새로운 질문일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틀림은 죄로 간주되고,
실패는 곧 비용으로 환산된다.
그러니 상상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괴롭다.
그들은 구조 바깥을 보는데, 구조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거나, 교정하려 든다.
한국의 교육은 평균을 만든다.
중간 이상, 적당히 모범적, 튀지 않는 범위에서의 ‘잘함’이 기준이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본질적으로 예외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을 그리는 일이다.
정답은 구조에 충실하지만, 상상력은 구조를 해체한다.
한국은 ‘김연아’를 사랑하고, ‘BTS’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그들이 자라던 시간, 그들에게 따뜻했던 시스템은 거의 없다.
그들은 구조를 통과한 예외였지, 구조가 만든 산물이 아니다.
즉, 이 사회는 천재를 원하지만, 천재를 길러낼 환경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건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결국 천재는 자생해야 하고, 대부분은 자멸하거나 이탈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정답이 없는 교육, 실패를 허용하는 사회, 이상한 것을 보호할 수 있는 문화는 가능한가?
상상력이 넘치는 이들이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 사회가 천재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미래를 만든다.
이 사회가 원하는 건 정답을 말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