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탕트의 미학

by 신성규

나는 오랫동안 딜레탕트적 삶을 혐오했다. 그들은 언제나 무사히 빠져나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 같았다. 전력투구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절반만 내던지며, 불꽃 대신 불씨만 지닌 채 살아가는 이들. 나에게 그들은 예술의 본질을 배반하는 비겁자처럼 보였다. 예술이란 존재를 불사르며 전진해야 하는 것, 삶을 불태우며 남기는 흔적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 시선이 전복되고 있다. 나는 이제야 그들의 삶 속에서 다른 차원의 숭고를 본다. 딜레탕트는 예술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며, 틈틈이 예술을 살아낸다. 그들의 절제는 단순한 안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자기 욕망을 묵살하는 의연함이다. 예술에 전력투구하는 전업 예술가가 때로는 사회의 짐이 되기도 한다면, 딜레탕트는 균형과 절도를 통해 예술을 삶의 윤리 안에 끌어들인다.


칸트가 말한 숭고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열정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반대편,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 속의 미학을 본다. 전력을 다하지 않는 선택, 절반의 힘으로도 예술을 놓지 않는 방식, 그것이야말로 삶을 파괴하지 않고 예술을 지켜내는 숭고일 수 있다.


딜레탕트의 미학은 불완전성의 미학이다. 그들은 거대한 작품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전체가 이미 한 편의 작품이다. 가정과 직장을 유지하며, 동시에 시를 쓰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 이는 ‘완벽한 예술가’의 신화를 해체하고, 예술을 삶의 양식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행위다.


나는 이제 묻는다. 예술은 반드시 전업의 형식으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혹은 절반의 헌신 속에서도 예술은 빛날 수 있는가? 딜레탕트는 이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증거다.


예술의 숭고함은 불타는 희생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절제와 균형 속에서, 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작고 느린 열정 속에서 더욱 오래 지속된다. 그 미학을 우리는 이제야 딜레탕트에게서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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