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작은 처음엔 우울증 환자에게 삶의 기능을 회복시켜주는 약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약이 시장에 풀리고 난 뒤, 그것은 단순한 치료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존 장치로 자리매김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높은 성과를 요구한다. 피로, 우울, 번아웃은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되고, 그것을 치유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때 프로작은 등장한다. 감정의 기복을 평평하게 눌러버리고, 식욕과 충동을 잠재우며, 불안과 집착을 조절하는 약. 결과적으로 개인은 더 이상 ‘휴식’을 요구하지 않고, 기계처럼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상태에 가까워진다.
프로작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최적화된 노동자”를 만든다. 그것은 치유의 언어를 빌린 규율 장치이며, 개인의 고통을 사회가 원하는 퍼포먼스 상태로 전환시키는 마법의 알약이다.
더 무서운 점은, 프로작이 사회적으로 ‘정상’의 기준을 재정의했다는 사실이다. 감정의 기복은 결함으로, 슬픔은 병리로, 우울은 교정해야 할 상태로 낙인찍혔다. 누구나 더 생산적이고 더 집중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은, 이제 자연스러운 사회적 합의가 되었다. 프로작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내면에 침투한 가장 세련된 음모인 셈이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프로작은 단순한 약물이 아니라 권력의 미시적 장치다. 몸과 마음을 교정하는 테크놀로지, 그리고 정상성을 재정의하는 규율. 자본주의는 폭력적 강제가 아니라, 이런 “치유의 이름으로 포장된 교정”을 통해 더 정교하게 작동한다.
프로작은 묻는다. 당신은 여전히 슬퍼할 권리가 있는가? 당신은 여전히 무력할 권리가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모든 감정은, 이 체제가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위해 조율되어야 하는가?
프로작은 단지 신경전달물질의 조절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인간 공학의 결과다. 그것은 개인을 위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체제에 봉사한다. 진짜 음모는 약 그 자체가 아니라, 우울을 병으로 만들고, 감정을 성과의 방해물로 만든 사회적 구조에 있다.
결국 프로작은 자본주의자들의 음모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을 치료하는 대신, 고통을 잊게 만들어 노동을 지속하게 하는 약이기 때문이다. 슬픔마저 체제에 적응하도록 길들이는 약. 그것은 치료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성과 사회의 비밀스러운 연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