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진보를 저해하는 매커니즘

by 신성규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이 서로 얽혀 복잡하게 흐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 다른 얼굴, 다른 생각에 쉽게 귀를 닫는다. 정치, 사회, 성별, 종교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상대를 미워하거나 배척하면서 듣기를 멈춘다. 그리고 듣지 않는 순간, 사회적 진보는 멈추고 만다.


혐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마비이며, 사회적 상호작용의 왜곡이다. 개인과 집단은 처음에는 각자의 의견과 관점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혐오와 배척 속에서 점점 동기화된 집단 의견으로 흡수된다. 서로 다른 생각은 위협이 되고, 위협은 배척을 낳으며, 배척은 다시 혐오를 강화하는 순환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현상은 정치적 극단화 속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선거철마다 사람들은 상대 진영의 주장을 듣기보다, 단편적인 뉴스와 SNS 글을 통해 상대를 비난한다. 정책을 지지하던 개인도 집단 압력 속에서 조금씩 목소리를 낮추고, 결국 집단의 시각에 동화된다. 극단적 편향이 심해지면, 설득은 사라지고 배척만 남는다. 진보와 혁신은 느려지고, 사회적 변화는 정체된다.


극단적 행동은 때로 선의에서 비롯된다. 채식주의자의 과격한 행동, 환경주의자의 과도한 시위, 심지어 SNS를 통한 강력한 캠페인까지, 모두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사회는 이를 항상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극단적 주장을 불편하게 여기고, 반감을 갖는다. 선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은 사회적 협력을 방해하며, 결과적으로 원했던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진보는 대화와 설득, 협력의 산물이다. 극단적 혐오와 강압적 행동은 이러한 조건을 붕괴시킨다.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의도만 좋으면 충분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빠른 판단과 단호한 배척, 감정적 반응이 지배한다. 예술과 문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혐오와 극단적 행동이 진보를 막는 구조는 온리인에서도 나타난다. 온라인 공간에서 극단적 주장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점점 동조하는 집단을 형성한다. 이때 개인의 의견은 집단의 의견으로 빨려 들어가, 마치 펜듈럼 웨이브처럼 하나의 리듬 속으로 동기화된다. 개별적 진동이 집단적 파동으로 흡수되듯, 개인의 독립적 사고는 소멸되고, 집단 의견이 우세해진다. 동조가 편안하게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개인의 비판적 사고는 점차 사라진다.


우리는 종종 좋은 일을 하면서도 세상을 망친다. 그것은 우리가 극단 속에서 움직이고, 혐오 속에서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진보를 위해서는 단순한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혐오와 극단적 행동이 역효과를 낳는 구조를 인식하고,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감정적 대응보다 설득과 대화를 우선하고, 극단적 주장은 완화하며, 협력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야 한다. 또한 개인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통찰이 없다면, 우리의 진보적 열망은 반복되는 혐오와 동조 속에서 흡수되어 결국 사라지고 만다.


현대 사회에서 혐오와 극단적 행동은 진보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선한 의도와 강렬한 열정만으로는 사회를 바꾸기 어렵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보와 변화는 단순히 의도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설득과 이해, 협력과 존중의 결과물이며, 그 속에서 개개인의 목소리가 함께 울릴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혐오와 극단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아무리 좋은 의도도 무력하게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진정한 사회적 변화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6화프로작은 자본주의자들의 음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