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전쟁과 진짜 투쟁의 대상

by 신성규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단순화를 시도한다. 복잡한 현실을 흑과 백, 선과 악,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인지의 오래된 습관이다. 이분법은 사고를 빠르게 정리하고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고, 적대를 고착화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사례는 이대남(20대 남성)과 래디컬 페미니즘의 대립이다. 표면적으로는 정반대의 진영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집단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서로를 향한 혐오 속에서 오히려 동일한 구조를 드러낸다.


푸코의 관점에서 권력은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만들어낸다. 권력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강제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도록 이끈다.


이대남은 군복무, 취업 경쟁, 젠더 정책을 통해 역차별 받는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을 가부장제의 피해자 주체로 호명한다.


이처럼 두 집단은 모두 피해자 정체성을 공유한다. 피해자라는 자리는 분노와 저항의 근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들을 권력 구조 안에 묶어두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개념으로, 사회가 특정 집단을 법과 권리의 바깥으로 몰아내면서 동시에 통제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이대남 담론 속 여성은 ‘특혜받는 존재’이자 ‘조롱의 대상’으로 이중적으로 배제된다.

래디컬 페미니즘 담론 속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이자 ‘응징의 대상’으로 위치한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의 언어 속에서 예외적 존재로 낙인찍힌다. 이 과정에서 대화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제거와 응징의 논리뿐이다. 이분법적 적대는 곧 사회적 공론장을 잠식한다.


지젝은 현대 정치가 종종 ‘상상적 적대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불안을 외부의 적에 투사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대남은 여성 혐오적 언어를 통해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이는 “역차별에 대한 정당한 분노”로 포장된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남성 혐오적 언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으로 정당화된다.


방향은 다르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혐오는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는 접착제이자,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적이 있어야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 논리는 결국 서로를 강화하는 거울상으로 작동한다.


이대남과 래디컬 페미니즘은 서로를 혐오하면서도, 사실상 서로를 필요로 한다. 상대방의 존재가 곧 자기 정체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적대의 순환 구조 속에서 사회는 다층적 현실을 잃어버린다.


그 결과, 정작 우리가 함께 마주해야 할 고통스러운 현실 문제들이 배제된다. 불안정한 노동, 학력·계급 불평등, 돌봄의 위기, 가족 구조의 해체, 그리고 청년 세대 전반의 불안은 성별 전쟁의 소음 속에 가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야말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삶을 직접적으로 옥죄는 진짜 적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갈등이 단순히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조장된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은 성별 갈등을 활용해 표를 결집시키고,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려 체제를 유지한다. 이대남과 래디컬 페미니즘은 서로 싸우지만, 그 싸움 속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결국 정치 권력이다.


우리가 이분법 속에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동안, 사실상 우리는 정치인들의 노예가 된다. 그들은 적대의 연극을 연출하고, 우리는 그 무대 위에서 분노와 혐오를 소비하며 진짜 문제를 외면한다.


따라서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분법을 넘어, 남성과 여성이 함께 싸워야 할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불평등한 경제 구조, 불안정한 노동시장, 돌봄과 가족 해체의 위기, 청년 세대의 미래를 위협하는 구조적 불평등이야말로 공동의 적이다.


진정한 성평등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는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에 맞서 연대할 때 가능하다. 이분법적 적대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단순한 사고의 기술을 넘어 공존의 윤리이자 해방의 정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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