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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한 상상

by 신성규

우리는 흔히 꿈을 상상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꿈은 ‘상상’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일지 모른다. 깨어 있을 때의 우리는 현실에 적응하고, 사회적 규범에 맞추며, 타인의 시선에 조율된 자신을 구성한다. 나는 현실에 내 자신을 맞춰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꿈에서 내 억압된 진짜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깨어 있는 나는 타협의 산물이고, 꿈속의 나는 원시적이며, 규범 이전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내면의 실재가 접근 가능한 또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는 오히려 제한되고 정제된 스크린이며, 꿈은 그 스크린의 뒤편에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원본 세계일 수 있다. 무의식의 절규이자, 우리가 미처 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단면이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욕망의 귀환’이라고 했고, 라캉은 꿈을 ‘상징계가 허용하지 않는 실재의 틈새’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의 신경과학은 꿈을 단순한 뇌의 잡음으로 보지 않는다. 꿈속에서의 감정, 사건, 상징은 기억, 감정 조절, 자기 인식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철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두 학문 모두 꿈에 또 하나의 존재방식이 숨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꿈에서 나오는 존재 — 억압되지 않은 ‘진짜 나’ — 그것이 더 실재적인가?

아니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규범화된 나가 더 실재적인가?


나는 그 둘이 경쟁하는 실체라기보다,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두 세계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나는 사회라는 프레임 안에서 나를 정제하고, 꿈의 나는 그 프레임의 바깥에서 나를 해방한다.

두 세계는 서로를 참조하며, 교차하고, 균형을 맞춘다.


결국 묻게 된다.

우리는 정말 한 세계만을 살고 있는가?

혹은 현실이 ‘주요 거주지’일 뿐, 꿈이야말로 우리가 몰래 드나드는 또 다른 거주지 아닐까?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두 세계가 겹쳐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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