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의 생각

by 신성규

사람들의 말은 점점 단단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이 깊어지는 일이 아니라, 생각이 굳어지는 일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의 언어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고, 질문 대신 결론이 먼저 온다. 사회적 질서는 선택지가 아니라 정답이 되고, 그 정답을 외우지 못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 과정에서 나의 시선은 자주 상처를 입는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외톨이가 되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아이였을 때는 순수함이 미숙함으로 용서되었지만, 어른이 된 뒤의 순수함은 비현실로 취급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는 참 순수해서 좋다.”

그러나 그 말의 끝에는 늘 생략된 문장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그들은 사회 질서에 편입됨을 택한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고, 설명 가능한 길을 선택한다. 나는 그 선택을 비난하지 못한다. 그 역시 생존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벌어진다. 나는 여전히 질문을 붙잡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미 답 위에 집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괴롭다.

이 감각을 지닌 채로 나이를 더 먹으면, 결국 혼자가 될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다. 이 직감은 공포라기보다 예감에 가깝다. 마치 이미 정해진 궤도를 바라보는 것처럼, 차분하지만 피할 수 없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예술가들을 볼 때면, 분명 나와 같은 영혼이 있음을 감지한다. 말의 속도가 다르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의 온도가 다른 영혼들.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이미 무덤에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해받지 못했고, 죽은 뒤에야 언어가 남았다.


나는 종종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반 고흐의 편지 속 고독,

릴케의 문장 속 떨림을 읽으며 생각한다.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는 영혼의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들과의 대화는 이상하게도 외로움을 덜어준다.

살아 있는 다수와는 연결되지 못했지만, 시간 너머의 소수와는 깊게 이어진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확인이다. 나의 감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수의 방향과 어긋나 있을 뿐이라는 확인.


어쩌면 순수함을 지킨다는 것은, 혼자가 될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한다. 굳어버린 세계 속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영혼은 늘 존재해 왔고, 그런 영혼들이 남긴 흔적이 예술이 되었음을. 살아 있는 동안 외톨이였던 그들이, 결국은 시대의 깊은 곳에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의 나는 괴롭지만,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나와 같은 영혼들이 지금은 무덤에 더 많이 누워 있을지라도, 언젠가 이 시간 또한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라는 희미한 믿음 때문에.

혼자가 되는 직감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연결을 꿈꾼다. 그것이 나의 고독이 단순한 고립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연대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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