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by 신성규

지구의 모든 것, 아니 우주의 모든 만물은 결국 하나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 사실에 가깝다. 모든 존재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미세하게라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떨어져 있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거대한 장 안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다. 서로 다른 파동으로 잠시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 그리고 죽으면 흙이 된다. 이 사실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자주 잊힌다. 흙이 된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다. 분해이자 해체이고 환원이다. 이 몸을 구성하던 물질은 다시 토양이 되고, 식물이 되고, 음식이 되고, 누군가의 혈액과 근육과 생각의 에너지가 된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음식도 과거의 누군가였고, 내가 내쉬는 숨도 언젠가 다른 존재의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늘 서로를 먹고, 서로를 숨 쉬며 살아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였다.


그런데 인간은 이 흐름 속에서 유독 강박적으로 ‘나’를 분리해낸다. 나의 지성, 나의 재능, 나의 소유, 나의 몸. 이것들이 모두 나의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어느 것도 완전히 소유한 것은 없다. 지성은 유전자와 환경과 우연의 결과이고, 몸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반납해야 할 것이며, 소유는 사회가 잠시 인정해주는 표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임차인에 가깝다.


세계는 우리에게 잠시 형태를 빌려주고, 우리는 그 안에서 ‘나’라는 감각을 경험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존재에 대해 지나치게 고뇌할 필요가 없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너무 단단한 실체로 오해할 때 생기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잠깐 나타난 과정이다. 의미를 반드시 고정해야 할 이유도 없고, 역할을 끝까지 완수해야 할 의무도 없다. 이미 우리는 세계의 일부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


삶이란 어쩌면 하나였던 것이 잠시 자신을 ‘나’라고 느껴보는 실험일지도 모른다. 이 실험은 성공과 실패로 평가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얼마나 특별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그 잠깐의 분리된 의식 속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얼마나 깊이 세계를 경험했는가다. 그래서 죽음은 종종 과대평가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경계의 해체다. ‘나’라는 울타리가 무너지고 다시 큰 흐름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빌렸던 것을 돌려줄 뿐이다. 몸을, 생각을, 이름을, 이야기를. 그리고 세계는 그것들을 다시 다른 형태로 사용한다.


이 지점에서 윤리는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모든 존재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타인은 완전히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나와 다른 형태를 취한 나이고, 나는 네가 잠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모습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과장되어 보이지 않고, 누군가의 어리석음이 이해 불가능하지 않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실패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은 흐름 안에서 다른 조건을 겪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잔인해지는 순간은 이 연결을 잠시 잊어버렸을 때다. 그러니 측은지심은 도덕적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에 가깝다. 우리가 본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잠시 떠올리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삶은 조금 가벼워진다. 반드시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끝까지 버티지 않아도 되고,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 하나와 숨 하나로. 존재는 과제가 아니다. 존재는 사건이다.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흘러가는 사건. 그러니 너무 고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이미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이며, 다시 하나로 돌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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