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며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변화는, 사람들보다 세계가 먼저 늙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은 서서히 순수함을 잃는다. 그것은 타락이라기보다 적응에 가깝다. 살아남기 위한 조정, 마찰을 줄이기 위한 타협.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 누군가의 생각이 둔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욕망이 세계의 규칙에 맞게 접히는 순간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과의 접점이 달라졌다. 같은 말을 해도 닿지 않고, 같은 사건을 봐도 다른 결론에 이른다. 사고의 속도나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그들은 점점 ‘가능한 것’ 안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여전히 ‘가능해지기 전의 것’을 붙잡고 있다. 그래서 대화는 무난해지지만, 관계는 얕아진다. 이 간극이 나를 괴롭힌다.
사람들의 욕망이 세계에 길들여지는 과정은 너무나 잘 보인다. 처음엔 의문이었고, 그다음엔 분노였고, 결국엔 계산이 된다. 무엇을 말하면 손해가 되는지, 어디까지 꿈꿔야 안전한지, 언제 침묵하는 것이 현명한지. 그것은 정상이다. 수년간 사회에 묶여 살아왔으니까. 사회는 욕망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모서리를 깎고, 소리를 낮추고, 유통 가능한 형태로 바꾼다.
아마 나는 조금 다른 쪽에 서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만의 세계관이 있고, 그 세계 안에서 사고가 먼저 움직인다. 누군가는 그것을 괴짜라고 부를 테고, 누군가는 미성숙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나는 아직 어떤 것들을 지켜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뇌가 행복을 찾는 방식—집중하고, 몰입하고, 의미를 구조로 세우는 방식—그 자폐적 기질이 오히려 순수함을 보존하는 방패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다.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문제로.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감각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어른이 되어도 세계에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 욕망을 계산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사람, 아직도 어떤 질문 앞에서 망설이고 흔들리는 사람. 그런 이들이 결국 예술을 만든다. 의도하지 않아도, 선택하지 않아도.
순수함은 유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단순화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쉽게 체념하지 않고,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는 자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개 그 태도를 버리는 일과 함께 온다. 그래서 순수함을 지키는 어른은 늘 고독하다. 주변과의 속도가 맞지 않고, 농담에 웃지 못하고, 모두가 “이제 그만하자”고 말할 때 혼자 계속 생각한다.
그 고독은 분명히 아프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세계가 나를 완전히 길들이지 못했다는 흔적. 그리고 어쩌면, 예술이 아직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