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병명은 없었지만 증상은 분명했다.
밤만 되면 심장이 먼저 깼고, 귀가 마지막까지 잠들지 않았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지나치게 살아 있다는 증거 같은 소리.
A는 천장을 보며 이를 갈았고,
B는 벽에 대고 사과를 던졌다.
사과는 늘 졌다.
벽은 늘 이겼다.
둘은 관리사무소 앞에서 처음 만났다.
서로를 보자마자 알았다.
눈 밑의 다크서클,
손에 쥔 카페인,
그리고 “혹시…”로 시작해도 될 얼굴.
“위층이죠?”
그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연대는 늘 고통의 정확한 좌표에서 생긴다.
처음 계획은 단순했다.
복수.
감정적이되 합법적인 방식으로.
그들은 위층을 월세로 계약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정중한 폭력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소리를 만들었다.
의도적으로.
예술적으로.
어쩌면 과도하게.
중요한 건 행위가 아니라 결과였다.
소리는 중력을 믿었다.
아래로 떨어졌다.
이전까지 가해자였던 집은
처음으로 피해자가 되었다.
사흘 후, 항의가 왔다.
일주일 후, 침묵이 왔다.
보름 후, 이삿짐 트럭이 왔다.
정의는 때로 이렇게 조용히 실현된다.
이상한 건 그 다음이었다.
복수가 끝났는데도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다.
같은 고통을 공유한 사람끼리만 생기는
기묘한 평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깊은 친밀감이었다.
그러다 그들은 깨달았다.
이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는 걸.
이건 구조의 문제라는 걸.
왜 어떤 소리는 참아야 하고,
어떤 소리는 자유인가.
왜 침묵은 미덕이 되고,
소리는 죄가 되는가.
그래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말도 안 되게.
그러나 아주 논리적으로.
“전파하자.”
“뭘?”
“소음을.”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메시지였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아직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아직 완전히 고립되지는 않았다는 신호.
그들은 이동했다.
조용한 도시,
너무 예의 바른 아파트,
밤이 지나치게 단정한 곳들.
그곳에 소리를 남겼다.
사람들은 화를 냈고,
동시에 어딘가 안심했다.
불쾌함과 생동감은 늘 같이 온다.
언론은 그들을 미친 사람이라 불렀고,
어떤 칼럼은
“현대인의 고독에 대한 극단적 은유”라 평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설명은 늘 재미를 망친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같은 소음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걸지도 모른다.
둘 중 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 이후로 A는 귀마개를 쓰지 않았고,
B는 벽을 두드리지 않았다.
밤마다 어딘가에서 소리가 났고,
도시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죽어 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