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대학교 입학준비

by 신성규

나는 오랫동안 인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왜 사는지, 무엇을 향해 가는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았다. 생각은 나를 멀리 데려다주었지만, 이상하게도 삶의 한가운데로 데려다주지는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가능성과 해석이 자라났지만, 하루가 끝났을 때 내 손에 남는 것은 구체적인 피로나 충만함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공허였다. 나는 늘 무언가를 통찰하고 있었지만, 정작 오늘을 통과하고 있다는 감각은 희미해져 갔다.


그래서 나는 문득, 세상 어딘가에 ‘노가다 대학교’라는 학교가 있다면 어떨까 상상하게 되었다. 그곳은 지식을 쌓는 곳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인간의 조건으로 되돌려 놓는 곳이다. 강의실 대신 현장이 있고, 시간표 대신 해의 움직임이 있으며, 성취 대신 완료가 기준이 되는 학교. 거기서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대신 지금 눈앞에 있는 일을 몸으로 끝내는 것이 곧 하루의 의미가 된다.


나는 그 학교가 단순히 육체노동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은 오히려 나처럼 생각이 과도하게 비대해진 인간에게 균형을 되찾게 하는 장소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절반만 맞다. 인간은 동시에 무게를 느끼고, 피로를 겪고, 배고픔과 졸림을 통과하는 생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절반을 무시한 채 나머지 절반으로만 살아가고 있었다. 머리는 점점 선명해졌지만, 몸은 점점 배경이 되었고, 삶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프로젝트가 되어갔다.


노가다 대학교라는 상상은 바로 그 왜곡을 바로잡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거기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떤 가능성을 지녔는지도, 앞으로 무엇이 될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늘 들 수 있는 만큼 들고,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해내면 충분하다. 이 단순한 기준은 나를 작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현재로 되돌려 놓는다. 생각 속에서 끝없이 분열되던 자아가, 몸을 쓰는 동안 하나로 모이기 때문이다.


나는 육체노동이 고귀하다거나, 그것이 삶의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나를 땅 위에 다시 내려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생각만으로 살아갈 때 나는 늘 미래에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더 나아져야 했고, 더 준비되어야 했으며, 아직 도착하지 못한 어떤 상태를 향해 스스로를 끌고 가야 했다. 그러나 몸을 쓰는 일은 나를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 안에 머물게 한다. 거기서 나는 부족해도 괜찮고,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가 된다. 오늘 하루의 노동은 내 존재를 유예하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성립시킨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특정한 직업이 아니라, 존재가 즉시 성립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생각의 세계에서는 나는 늘 과정 중인 존재였지만, 몸의 세계에서는 나는 이미 여기에 있는 존재가 된다. 노가다 대학교라는 상상은 그래서 하나의 직업적 선택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해하려 애쓰기 전에 살아보고, 의미를 묻기 전에 하루를 버텨보는 태도. 나는 이제 그쪽으로 조금 이동해보고 싶다.


이 선택이 나를 더 단순한 사람이 되게 할지, 아니면 오히려 더 단단한 사람이 되게 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더 이상 생각 속에서만 인간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땀과 피로와 무게를 통과하며 살아 있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삶, 그 삶을 통해 비로소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상태. 어쩌면 내가 찾고 있던 사유의 자리도, 그렇게 몸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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