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라는 문

by 신성규

인간은 대개 세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면서 우리는 굳이 묻지 않는다. 왜 사는지, 내가 누구인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같은 질문은 삶이 무난히 흘러갈 때는 떠오르지 않는다. 의미는 공기처럼 주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들이마신다.


그러나 삶이 우리를 세게 흔드는 순간이 있다. 사랑이 부서지고, 몸이 무너지며, 믿었던 세계가 금이 갈 때, 익숙하던 풍경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매일 걷던 거리가 처음 보는 무대처럼 느껴지고, 사람들의 얼굴이 어딘가 멀게 보인다. 나조차 나 자신에게서 한 발 떨어진 듯, 투명한 유리막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 세계는 여전히 거기에 있는데, 더 이상 나를 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철학 이전의 감각이다. 인간의 신경이 감당할 수 없는 불안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 할 때 나타나는, 깊고 고요한 단절의 상태. 너무 큰 고통 앞에서 몸이 감각을 무디게 하듯, 정신은 세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렇게 의미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사물들만 남는다. 이유 없이 놓인 의자, 설명 없이 자라는 나무, 그저 숨 쉬고 있는 나 자신.


카뮈와 사르트르는 바로 이 풍경을 외면하지 않았다. 세계가 이야기로 엮이지 않고, 의미를 벗겨낸 채 드러나는 순간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문장은 차갑고, 고요하며, 때로는 숨이 막힐 듯 정직하다. 존재는 더 이상 따뜻한 서사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면 서늘할 것 같은 덩어리로 나타난다. 그것이 부조리이고, 구토이며, 실존의 맨살이다.


하지만 이 감각은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삶이 무너지는 순간, 누구나 한 번쯤 이 자리에 선다. “왜 살아야 하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지?”라는 질문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상실을 겪은 인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이다. 실존주의는 높은 지능의 산물이기 전에, 상처 입은 의식이 세계를 다시 보게 될 때 열리는 틈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상한 존재다. 의미가 사라졌다고 느끼면서도, 완전히 멈춰 서지는 않는다. 눈물 속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허무를 말하면서도 따뜻한 밥을 먹으며,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입으로 다른 이를 걱정한다. 세계가 낯설어졌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찾는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실존의 바닥은 차갑지만, 그 위에 피어나는 태도는 놀라울 만큼 따뜻하다. 아무 보장도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려 애쓴다. 설명되지 않는 삶 속에서 작은 친절 하나를 건네고, 이유 없는 존재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 어쩌면 의미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를 통과한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내미는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존주의가 보여준 것은 절망의 철학이 아니라, 환상이 벗겨진 자리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남는지를 드러낸 기록에 가깝다. 모든 장식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느끼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누군가를 향해 움직인다. 세계가 차갑게 식어버린 뒤에도, 마음 어딘가에서는 미세한 온기가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의미를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나’라는 중심을 조금 내려놓는다. 세계가 공허해 보이던 자리에 고요가 들어오고, 설명 대신 연민이 자리 잡는다. 부처의 자비나 예수의 사랑은, 부조리를 논파한 결과라기보다, 부조리 속에서도 존재를 끌어안는 태도의 극단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끝이 아니라 하나의 문일지도 모른다. 세계가 무너져 보이는 밤을 통과하며, 인간은 처음으로 꾸밈없는 존재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이는 절망을 붙들고, 어떤 이는 질문을 붙들며, 또 어떤 이는 조용히 타인을 향해 손을 내민다.


아무 의미도 보장되지 않는 우주 속에서, 그럼에도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이 움직임. 바로 그 쓸쓸하고도 다정한 몸짓이,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장 깊은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보상심리가 만들어내는 중독의 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