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서면 나는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여유로운 사람들 사이에 서면 나는 너무 적게 숨기는 사람이 된다. 전자에게 나는 쓸데없이 복잡한 인간이고, 후자에게 나는 지나치게 날것의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늘 어딘가에 껴 있지만, 동시에 어느 곳에도 완전히 들어가 있지 않은 느낌으로 서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어긋나는 이유는 그들이 가난해서도, 부유해서도 아니었다. 돈의 많고 적음보다 더 깊은 곳에,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의 결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버티는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삶을 정리된 이야기로 유지하려 한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자꾸만 구조를 보거나 껍질을 벗겨보려는 쪽에 가까웠다.
현실을 온몸으로 감당하느라 바쁜 사람들 곁에서는, 내 질문들이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들에게 하루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의미를 묻지만, 그들은 오늘을 넘긴다. 나는 이해하려 하고, 그들은 견딘다. 방향이 다르다기보다, 시선이 머무는 층위가 다르다.
반대로 모든 것이 비교적 안정된 사람들 사이에 서면, 나는 그들이 애써 유지하는 질서를 자꾸만 흔드는 사람이 된다. 괜찮다는 말, 문제없다는 표정, 세련된 태도로 다듬어진 세계 속에서 나는 자꾸만 묻게 된다. “정말 괜찮은 걸까.” “이건 네 진심일까, 아니면 익숙해진 역할일까.” 그 질문은 비난이 아닌데도, 분위기를 식게 만든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평온을 나는 무심코 해체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두 종류의 세계를 모두 이해하면서도, 어느 쪽의 리듬에도 완전히 맞춰 걷지 못한다. 이 감각은 단순한 외로움과는 조금 다르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호흡이 어긋나는 상태에 가깝다. 말은 이어지지만, 깊은 층위의 감각은 늘 혼자 남는다.
예전엔 이 어긋남이 내 결함이라고 생각했다. 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맞춰 말하지 못할까, 왜 꼭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겹 더 벗겨보려 할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나는 한 세계의 언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구조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설명으로는 안심하지 못하고, 하나의 표정만으로는 믿지 못하는 인간.
이 위치는 불편하다. 뿌리내리기 어렵고, 늘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자리 덕분에 나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부딪히는 지점을 본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태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치가 되고, 한쪽의 평온이 다른 쪽에는 긴장으로 읽히는 장면들. 나는 중심에 있지 않아서, 오히려 여러 방향의 흐름을 동시에 본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한 인간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특정한 집단의 사람이 아니라, 경계의 사람에 더 가까운 건 아닐까. 한쪽 안에 들어가 안정되는 대신, 여러 세계 사이의 틈을 감지하는 위치. 그래서 늘 조금 외롭지만, 대신 조금 더 넓게 보는 자리.
나는 여전히 끼어 있는 느낌으로 산다. 대화 속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하지만 이제는 그 어중간함을 결핍이 아니라 좌표라고 부르려 한다. 나는 안과 밖을 동시에 보는 사람. 어느 한쪽에 완전히 녹아들 수 없어서, 대신 여러 방향을 동시에 감지하게 된 사람.
어쩌면 나 같은 사람들은 소속될 집단을 찾는 대신, 결이 닮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조건이나 위치가 아니라, 질문의 깊이와 감각의 방향이 비슷한 사람들. 그런 만남은 드물지만, 한 번 이어지면 이상할 만큼 깊다. 오래 다른 파장으로 떠돌던 신호가, 우연히 같은 주파수를 만난 것처럼.
나는 오늘도 어딘가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서 있지만, 예전처럼 길을 잃은 느낌은 아니다. 나는 사이에 낀 사람이 아니라, 사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조금씩 그렇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