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

by 신성규

우리는 자꾸 “나중”을 위해 오늘을 유예한다. 지금의 피로를 견디면 나중에 편해질 거라고, 지금의 불안을 감수하면 미래가 안전해질 거라고 믿으며 산다. 하지만 그렇게 미뤄둔 삶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미래를 준비하다 보니 현재를 살 시간이 사라진다. 하루하루가 목적지가 아니라, 통과해야 할 관문이 된다.


이건 단순히 개인이 성실해서 생긴 태도라기보다, 우리가 서 있는 구조와 닮아 있다. 경쟁은 점점 촘촘해지고, 한 번 밀려나면 다시 올라오기 어려운 사회에서는 누구도 쉽게 멈출 수 없다. 노력은 선택이 아니라 기본값이 되고, 쉼은 보상이 아니라 위험처럼 느껴진다. 분배가 삶의 충격을 완충해주지 못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오롯이 혼자 떠안은 채 오늘을 저당 잡힌다.


그래서 우리는 늘 대비한다. 아직 오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실패를 먼저 막으려 애쓴다. 삶은 경험이 아니라 관리가 되고, 하루는 살아내는 시간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변수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현재는 점점 얇아지고, 미래는 점점 무거워진다.


남미의 어떤 장면들을 보면 전혀 다른 리듬이 보인다. 완벽하게 안전하지도, 완전히 풍요롭지도 않은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음악을 틀고, 거리로 나와 춤을 춘다. 내일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을 더 붙잡는 듯한 태도. 물론 그곳에도 불평등과 고통은 존재하지만, 적어도 일상의 표정만큼은 “버틴다”기보다 “산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낭만을 느끼지만, 동시에 쉽게 따라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너무 많은 것들이 성과와 연결되어 있고, 잠깐의 이탈도 곧 불안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조차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이유는,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바닥이 얇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떨어지면 다칠 것 같은 사회에서는 누구도 마음 놓고 몸을 기대지 못한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미래를 대비하는 능력이 지나치게 발달하면서, 현재를 느끼는 감각은 점점 퇴화해버린 건 아닐까. 더 오래, 더 안전하게 살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생동감을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삶이 점점 프로젝트처럼 느껴질수록, 우리는 성공에 가까워지는 대신 살아 있음에서는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둘을 단순히 비교할 수도 없다. 현재를 즐기는 태도 뒤에는 때로 체념이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 뒤에는 책임이 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성숙하냐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버렸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만 보는 사회는 지치고, 현재만 보는 사회는 흔들린다.


어쩌면 필요한 건 거창한 해답이 아니라, 아주 작은 균형일지도 모른다. 내일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오늘 저녁 한 시간을 온전히 쓰는 것. 미래를 계산하면서도, 가끔은 이유 없이 웃고 떠드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 삶이 전부 투자나 대비가 되지 않게, 조금쯤은 쓸모없는 시간을 남겨두는 용기.


우리는 내일을 위해 사느라 오늘을 미루는 데 익숙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일이 와도 우리는 또 다른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 삶은 영원히 시작되지 않는 셈이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 쓸모도 없는 저녁이 필요하다. 생산적이지 않은 대화, 이유 없는 산책, 괜히 크게 웃는 시간.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들이 오히려 삶 그 자체에 가장 가까운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건 성공하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 목적 없이 존재하는 시간을 견디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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