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이 발달할수록 돈벌기가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단순히 현실 감각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돈은 대개 욕망의 단순화 위에서 만들어지는데, 형이상학적 사고는 그 욕망의 구조를 해체해버린다. 무엇을 원하게 만드는지, 왜 그것이 반복적으로 작동하는지, 그 메커니즘이 먼저 보인다. 그러다 보니 욕망을 자극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알면서도 하지 못한다.
위대한 예술가들 중 다수가 가난했다는 사실은 미화될 필요도, 낭만화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대체로 세상에 무능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과도하게 민감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팔아야 사람들이 반응하는지 몰랐던 게 아니라, 그 반응이 얼마나 훈련된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흐름에 자신을 얹는 대신, 한 발 비켜서서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그 선택은 종종 생존을 어렵게 만들었다.
돈이 되는 행위의 상당수는 얄팍한 욕망을 건드리는 일이다. 불안을 자극하고, 결핍을 확대하고, 타인과의 비교를 부추긴다. 나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안다. 어떤 말이 클릭을 부르고, 어떤 이미지가 소비를 유도하는지, 어떤 문장이 사람을 흔들어 놓는지 구조가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걸 실행하려 할 때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든다기보다, 그 행위가 너무 ‘훈련된 감정’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계속 의식된다.
보통 사람들의 정서가 때로는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슬픔, 분노, 열망조차 개인의 내면에서 자라난 것이라기보다, 사회가 반복적으로 학습시킨 반응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무엇에 화내야 하는지, 무엇을 부러워해야 하는지, 언제 만족해야 하는지가 이미 정해져 있고, 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 감정을 연기한다. 그 연기를 정확히 건드리면 돈이 된다. 그러나 그 구조를 인식한 순간, 그 연기에 동참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형이상학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많은 쓸모를 한꺼번에 드러낸다. 그래서 오히려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단순히 “이게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움직이기엔, 그 이면의 비용이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어떤 감각을 무디게 해야 하는지, 어떤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아야 하는지가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돈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가 된다.
아마도 그래서 형이상학적 사고를 깊이 밀고 나간 사람들은 늘 경계에 서 있었을 것이다. 완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 안에 편안히 안착하지도 못한 채.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다. 이들이 돈을 못 벌었던 이유는 욕망을 몰라서가 아니라, 욕망을 너무 잘 알아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앎은 때로, 가장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