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내 아이에게 책을 너무 많이 읽게 하고 싶지 않다. 이 말은 지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지성을 너무 이르게 획득한 사람만이 아는 조심스러움에 가깝다. 나는 여섯 살, 일곱 살 무렵부터 어른들이 읽는 고전문학을 읽었고, 그 세계는 깊고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아이의 시간에는 과도하게 넓었다. 문장은 나를 키웠지만, 그만큼 현실은 얇아졌다. 뛰놀며 세계를 몸으로 익혀야 할 시기에 나는 이미 인간, 운명, 비극, 구원 같은 단어들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해는 감탄으로 시작해 곧 책임으로 변했다. 생각할 수 있다는 능력은 특권이었지만, 그 특권은 나를 또래보다 앞서 보내는 대신 혼자 남겨두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사유는 인간을 성장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을 괴롭힌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계획과 희망의 능력이지만, 같은 능력은 곧 불안과 압박을 낳는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살아버리는 감각,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실패를 끝없이 시뮬레이션하는 마음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현재를 소모시킨다. 과거를 해석하는 힘 역시 마찬가지다. 성찰은 삶을 깊게 만들지만, 지나치면 후회가 된다. 이미 지나간 선택들을 다시 배열하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끌어오는 능력은,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결핍된 것으로 만든다. 요즘 나는 내 뇌가 나를 행복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는 감각을 자주 느낀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기보다는 과거와 미래 사이를 왕복하며 의미를 생산하는 기관, 인간의 지성은 분명 축복이지만 동시에 탈출하기 어려운 구조물이다.
그래서 나는 선악과를 떠올린다.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에덴에 머물 수 없었다는 이야기.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눈, 의미를 묻는 질문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평온을 빼앗았다. 무지 속의 평화는 사라지고, 인식 속의 불안이 시작된다. 그러나 나는 이 신화를 단순한 경고로 읽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조건에 대한 서술에 가깝다. 알지 않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알게 된 이상 그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지성이 아니라, 지성을 어떻게 통과하느냐다.
나는 똑똑하면서도 극한의 순수를 유지하는 길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생각을 버리는 길이 아니라,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인 뒤에도 삶을 사랑하는 태도다.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무지로 후퇴하는 것은 쉬운 선택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안식일 뿐이다. 진짜 어려운 길은 모든 구조를 이해하고, 모든 모순을 본 뒤에도 냉소로 도피하지 않는 것이다. 지성은 세계를 해부하지만, 순수는 세계를 다시 껴안는다. 이 둘을 동시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균 이상의 감내가 필요하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멀리 생각하고, 더 깊이 책임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을 외주화하지 않고 스스로 통과해야 한다.
행복은 단순해질수록 가까워지지만, 진실은 단순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진실을 포기하거나, 진실을 위해 행복을 유예한다. 나는 그 둘 사이의 긴장을 끌어안는 쪽을 택해왔다. 그것은 초인적인 고통을 요구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생각하고,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을 느끼며, 남들보다 더 많은 층위에서 세계와 접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이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정직한 길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이에 대해서도 같은 선택을 한다. 언젠가 지성의 문은 열리겠지만, 너무 이르게 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먼저 문장으로 이해하기 전에 햇빛과 바람, 실패와 웃음, 말 이전의 시간을 충분히 건너게 하고 싶다. 생각은 늦게 시작해도 따라잡을 수 있지만, 몸으로 축적된 세계감은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성은 훈련으로 얻을 수 있지만, 순수는 환경과 시간 속에서만 자란다.
지성은 늦어도 된다. 그러나 순수는 한 번 깨지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일찍 배웠고, 그 배움의 대가가 무엇인지 아직도 몸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