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by 신성규

내 여자친구는 내 첫사랑과 닮았다. 닮았다는 말은 얼굴이나 말투 같은 외형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각자가 지닌 공기의 밀도가 있는데, 그녀의 공기는 내가 아주 오래전,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던 시절에 맡았던 그것과 비슷하다. 세상을 전부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부 경계하지도 않는 상태. 상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상처를 겪고도 완전히 닫히지 않은 마음. 나는 그 결을 알아본다. 아마도 나는 늘 그 결을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었고, 똑똑한 사람도 있었고, 나를 강하게 자극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화가 날카롭게 오가는 관계도 있었고, 감정이 불꽃처럼 타오르다 빠르게 식어버린 관계도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능숙해졌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고, 감정의 흐름을 예측했고, 상처를 최소화하는 거리 조절을 익혔다. 사랑조차도 구조로 파악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는 더 또렷해졌다. 순수한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이었다.


순수함은 어리숙함이 아니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복잡함을 알고도, 그것에 완전히 물들지 않겠다고 조용히 결심한 태도에 가깝다. 그녀는 단단하다. 자기 삶에 대한 기준이 있고, 자기 감정의 결을 알고 있으며,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연약하다. 사랑 앞에서는 여전히 망설이고, 상처받을 가능성을 감수하며, 솔직해질 줄 안다. 나는 그 연약함이 좋다.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처럼 사랑을 안다. 사랑을 계산하지 않는다. 이만큼 줬으니 저만큼 돌아와야 한다는 식의 거래를 하지 않는다. 사랑을 증명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건넨다. 나는 그 태도 앞에서 종종 멈춘다. 나는 늘 생각이 많았고, 감정을 해석하려 했고, 관계의 방향을 예측하려 했다. 나의 뇌는 언제나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처리하며 현재를 압박해왔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그 기계 같은 작동이 잠시 멈춘다. 나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어도 된다.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우리를 아무도 모르는 시골로 가자고. 돈을 피해 살자고. 처음에는 그 말이 막연하게 들렸다. 나는 현실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자본의 흐름과 구조를 읽으며 살아온 사람이다. 돈은 수단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수단을 정교하게 다루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왔다. 그런데 그녀의 말은 도피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처럼 들렸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가. 돈이 우리를 지탱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돈을 붙들고 있는가. 그 질문은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축을 조용히 흔들었다.


나는 그녀를 안락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말이 의존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연락하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존중한다. 의존은 결핍에서 비롯되지만, 의지는 선택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녀 없이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일 때 더 안정된다. 내 사고는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지만, 그 회전이 날카롭게 나를 베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약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굳어버리지 않도록 풀어주는 사람이다.


왜 나는 첫사랑과 닮은 사람에게 다시 끌렸을까. 아마도 나는 순수함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떤 부분이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오래 바라볼수록 사람은 쉽게 냉소로 기운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고,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상처도 적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워왔다. 그런데 그녀는 그 보호막을 조용히 내려놓게 만든다. 억지로 벗기지 않고, 필요 없다는 듯이 옆에 서 있다.


그녀를 만나면 나는 아이가 된다. 계산하지 않고, 전략을 세우지 않고,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머문다. 나는 그 상태가 낯설면서도 편안하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감각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관계를 해석하지 않아도 되며, 사랑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을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녀는 내게 그 가능성을 다시 열어 보인다.


우리는 시골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돈을 완전히 떠나 살지 못할 수도 있다. 현실은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나는 여전히 구조를 읽으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그녀와 나는 돈보다 우리가 먼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보다 우리의 호흡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나를 멈추게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랑은 때로는 나를 뜨겁게 만들었고, 때로는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나를 고요하게 만든다. 고요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본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는 그녀를 본다. 우리는 의존하지 않지만 의지한다. 붙잡지 않지만 놓지도 않는다. 그 사이의 균형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이 두렵지 않다는 감각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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