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능자와 대화

by 신성규

고지능자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마치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다른 층위의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다. 우리는 단어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교환한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그는 그 질문이 놓인 전제, 그 전제가 기댄 세계관, 그리고 그 세계관이 만들어낼 윤리적 귀결까지 동시에 꺼내 놓는다. 대화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나선처럼 감기며 올라가고, 때로는 심연으로 떨어진다. 그에게 세계는 주어진 규칙이 아니라 잠정적 가설이다. 도덕은 배워서 따르는 규범이 아니라, 끝까지 밀어붙인 사유의 부산물이다. 목표 역시 사회가 제공한 성공의 목록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한 좌표 위에 찍힌 점이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종종 외부 세계와의 긴장을 전제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이 길이 옳은가, 왜 이 속도가 정상인가, 왜 이 성공이 가치 있는가를 묻는다. 그 질문은 주변을 불편하게 한다. 세상은 안정성을 사랑하고, 반복을 통해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복 속에서 균열을 본다. 규칙은 효율적이지만, 효율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세계와 조금씩 어긋난다. 때로는 무심코 사람들을 NPC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각본에 적힌 대사를 반복하듯 사회가 설계한 경로를 따르는 존재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정해진 보상과 처벌의 구조 안에서 예측 가능한 선택을 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일 때, 우리는 자신이 다른 층위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어긋남은 때로 오만으로 오해받는다. 사람들을 패턴으로 읽는 능력은 쉽게 냉소로 번진다. 누군가의 선택이 사회적 보상 체계에 의해 예측 가능해 보일 때, 우리는 그를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 순간, 세계는 단순해진다. 그러나 단순해진 세계는 외롭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규율 속에서 움직이고, 우리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규칙의 감옥을 짓게 된다. 자기만의 윤리, 자기만의 기준, 자기만의 성공 정의가 절대화될 때,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고립이 된다. 우리가 타인을 NPC라 부르는 순간, 우리 또한 스스로가 만든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에 갇힐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능자와의 대화가 주는 기쁨은 분명하다. 그것은 이해받는 감각에 가깝다. 문장의 속도를 줄이지 않아도 되고, 설명을 덜어내도 되며, 비약을 해도 맥락이 끊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침묵이 공백이 아니라 사유의 연장선이 된다. 세계를 객체로 올려놓고 함께 해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세상이 제공하는 역할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기 언어로 말한다.


아마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월감이 아니라 공명일 것이다. 세계를 부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세계를 더 정밀하게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규칙을 거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규칙이 어디서 왔는지 끝까지 알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불화하지만, 그 불화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고지능자와의 대화는 그 확인의 의식이다. 서로가 서로의 과잉 사유를 견딜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잉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연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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