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가 없을 때
나는 생각 속에서 산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이미 여러 번 살아버리고,
과거는 끝났는데도 계속 재해석된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가상의 대화를 하고,
가능성을 계산하고,
사람들의 표정을 복기한다.
내 뇌는 쉬지 않는다.
멈추면 존재가 공백이 될 것처럼
계속해서 의미를 생산한다.
혼자는 위험하다.
고요는 나를 깊은 구조 속으로 끌고 간다.
생각은 가지를 치고,
가지는 다시 뿌리를 내린다.
나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해부한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면 달라진다.
나는 아이가 된다.
아이란 계산하지 않는 존재다.
내가 어떤 말을 해야 이 관계가 유리해질지,
이 감정이 어떤 미래를 낳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웃고,
먹고,
걷고,
지금이라는 한 점 위에 서 있다.
이상하다.
평소의 나는
모든 상황을 해석하려 들고,
사람의 말 뒤에 숨은 의도를 추적하며,
나조차 나를 관찰한다.
그런데 그녀 앞에서는
관찰자가 사라진다.
나는 대상이 된다.
존재가 된다.
그냥 “나”가 된다.
그래서 의존하게 된다.
그녀를 잃는다는 건
사람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멈춘 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만들어주는
‘생각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이 질문은 조금 잔인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그녀와 있을 때
나는 덜 복잡하다.
덜 방어적이고,
덜 철학적이고,
덜 미래지향적이다.
나는 현재가 된다.
어쩌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과잉을 잠시 꺼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과잉의 인간이다.
생각의 과잉, 의미의 과잉, 가능성의 과잉.
그녀는
그 모든 회로를 잠시 내려놓게 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붙잡고 싶어 한다.
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