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혹은 지적으로 조금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신론이 멋져 보였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일종의 지적 독립 선언처럼 느껴졌다. 두려움에 기대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것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 세계를 이성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젊은 정신에게 무신론은 거의 하나의 미학이었다.
신은 설명되지 않는 것의 편의적 이름처럼 보였다. 번개가 치면 신의 분노라고 말하고, 가뭄이 들면 신의 시험이라고 말한다. 그 모든 서사는 결국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덮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 같았다. 더 나아가 종교는 때때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고, 그 두려움 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신의 이름으로 복종을 요구하고, 죄의식을 심고, 공동체를 통제한다. 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무신론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윤리처럼 보였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더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약했다. 그리고 그 약함은 비난의 대상이라기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구조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두려워했고, 누구나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흔들렸다. 인간의 지능이 아무리 높아져도 죽음 앞에서는 여전히 원시적인 불안이 올라온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찾아온다. 논리와 과학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왜 살아야 하는지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 지점에서 나는 종교를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종교는 단순히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구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 구조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을 믿으며 삶을 버틴다. 그 믿음이 완전히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을 절망에서 끌어올린다면, 그 믿음은 단순한 착각 이상의 역할을 한다. 나는 그 지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끔 신을 믿는 사람들을 다시 본다.
그들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빈 공간에 어떤 의미를 세워두는 행위. 그것은 지적 패배라기보다 하나의 존재론적 선택처럼 느껴진다.
물론 여전히 종교에는 문제가 많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도 많았고, 지금도 종교는 때때로 권력과 결탁한다. 그래서 종교를 경계하는 시선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종교를 단순한 미신으로만 보지 않는다.
인간은 의미 없이 살기 어렵다.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는 동물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은 그 이유를 담아두기 위해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언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제 신을 믿는 사람들을 쉽게 조롱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오히려 가끔은 생각한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인간이 얼마나 깊이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갈망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본능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