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 1편:젠더 역할에 대한 철학적 단상

by 신성규

나는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여성은 과연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

왜 이 질문 자체가 필요한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여성은 ‘여자’라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 올라야 했다.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전에,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로 불리는 존재.

그녀의 사유는 곧 관계의 사유로 환원되고,

그녀의 존재는 타인을 위한 용도로 정의되었다.


젠더란, 사회가 몸 위에 덧씌운 역할극이다.


가부장제는 단지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뇌 속에, 몸 속에, 말투 속에, 의식의 문장구조 속에 박혀 있다.

“여자는 조심해야 해.”

“여자는 감정적이야.”

“여자는 예쁘게 웃어야지.”


이 모든 문장은 명령이다.

자기 사유를 금지하고,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라는 명령.


몇몇 여성들은 이 각본을 찢어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외쳤다.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유할 권리를 위한 구조적 조건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성이란 이름은 사회가 주입한 프로그램이며,

그 프로그램은 ‘타자로 존재하라’는 구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성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대로 존재하며 살아간다.

왜?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눈이 이미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제도, 정조 개념, 혼인신고, 처녀성 신화.

이 모든 것은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였다.

남성의 불안을.


결혼은 ‘사랑’의 증명이 아니라,

소유의 제도화였고,

정조는 ‘순수함’이 아니라,

통제의 이름이었다.


한 인간의 몸과 마음, 시간을

‘법적으로 확보’하는 시스템은

오랫동안 여성을 무대 위 ‘소유된 배우’로 만들었다.



오늘날 여성은 투표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회사에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그 자유는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우리는 여전히 ‘예쁜 여자’, ‘능력 있는 여자’, ‘엄마 같은 여자’를 기대한다.

그녀의 옷차림은 판단의 대상이고,

목소리는 ‘기세’로 해석되며,

감정은 ‘예민함’으로 불리운다.


심지어 여성들 스스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자기검열은 가장 오래된 감옥이다.


철학은 늘 ‘보편’을 말해왔다.

하지만 그 보편은 늘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성적 사고’, ‘객관적 판단’, ‘독립적 사유’란 이름으로

감정과 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고를 무시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묻자.

타자에 대한 감각, 관계에서의 윤리, 몸의 기억과 말 없는 언어,

그 모든 것이 왜 철학이 될 수 없었는가?


여성적 사유는 단지 ‘감성적’이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절반이 오랫동안 억눌러온

다른 방식의 진실이다.

‘관계’가 약점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책임’으로 작동될 때,

그것은 윤리의 가장 깊은 뿌리가 된다.


여성은 독립적 사유를 할 수 있는가?

그렇다. 하지만 그 사유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 사회에 의해 오랫동안 제거되어 왔을 뿐이다.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젠더라는 연극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제, 무대 위에서 퇴장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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