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오래 보고, 오래 만나고, 오래 관찰하면
그 사람의 유년기가 보인다.
말투의 끝에서,
상대의 말이 닿기 전에 움츠러드는 눈빛에서,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하거나, 너무 늦게 마음을 여는 방식에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애착 관계를 맺기 어려운 사람들을
감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불안정하고, 동시에 지나치게 사랑을 갈망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주 이끌린다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한 여성들.
그들은 흔히 정서적으로 결핍되어 있지만,
그 결핍 때문에 사랑을 아주 적극적으로 갈망한다.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은, 사랑을 가장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이건 비난이 아니다. 관찰이다.
불안정 애착을 가진 이들은
사랑을 확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불안을 전가한다.
사랑을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떠나갈 준비를 한다.
결국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방어의 구조가 된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에게 끌렸는가?
단순하다.
그들은 사랑을 갈망하는 방식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
그건 내게 감정의 진실성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진실한 감정과 지속 가능한 관계는 다르다.
그들은 진심이지만
그 진심은 매 순간 변동하고,
상대를 소진시키며 유지된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 했지만,
어쩌면 나 역시 구원자 콤플렉스 같은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라는 말로 나 자신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있었는지도.
인간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자기 기억과 감정의 재연본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상처 입은 과거의 사람을 현재에서 다시 만나고,
그를 사랑함으로써 과거의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
하지만,
그 기억은 구원될 수 없고
그 관계는 치유의 무대가 아니다.
결국,
사랑은 애착의 문제이고,
애착은 유년기의 메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