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를 넘어서

by 신성규

결혼은 왜 존재하는가.

어릴 적엔 꿈처럼 보였다. 자라며 의무처럼 다가왔다.

이제는 의심한다. 이것은 사랑의 제도가 아니라, 소유의 제도라고.


사랑이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햇살이 형광등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

태어났으니 등록하고, 결혼했으니 증명하라.

누가 누구를 소유했는지 명확히 하기 위해.


결혼은 이성애 규범의 그물 위에 지어진 시대의 골조물이었다.

노동, 부양, 출산, 상속을 모두 하나의 프레임에 묶는 편리한 시스템.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은 ‘편리함이라는 이름의 불안’ 위에 서 있다.


아이를 기른다는 건 생명을 돌보는 일이다.

그 돌봄은 왜 두 사람에게만 강제되는가?

왜 여성은 여전히 ‘모성’이라는 명분 아래 ‘노동’의 사슬을 끌어야 하는가?


공동육아 사회는 이상이 아니다.

자유로운 연대다.

모든 아이가 동등하게 성장하고, 모든 인간이 사랑에 대해 실험하고 실패할 수 있는 사회.

사랑이 실패하는 게 죄가 아닌 사회.

관계가 끝났다고 그 관계 전체를 부정당하지 않는 시스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제도의 벽을 문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 문을 지나, 그 벽 자체를 철거할 수 있다.

사랑은 계약이 아니라 존중과 해방의 상태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혼란을 부른다.”

그러나 나는 되묻는다.

“당신의 평화는, 누구의 억압 위에 세워졌는가?”


카사노바는 자유로운 영혼의 대명사로 조롱당했지만,

그의 삶에는 진심이 결여되지 않았다.

많은 여성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건 늘 진심이었다.


반면, 오늘의 도시는 겉으로는 안정되어 있고,

그 안의 인간관계는 텅 비어 있다.

가짜 평화, 위장된 애정, 법적 사랑.


제도는 사랑을 담기에 너무 무겁다.

자유는 서약이 아니라 선택이다.

가부장제, 정조 관념, 소유적 결혼관…

이 모든 제도는 ‘사랑은 불안하다’는 공포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진정한 사랑은 불안을 감내할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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