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이켜보면, 종교는 언제나 기존 질서와의 충돌 속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가종교와 맞서며 성장했고, 이슬람은 부족 중심의 구조를 넘어 형제애와 단일 신의 법으로 혁명적인 질서를 제안했다. 불교 또한 인도 브라만교 중심 체계에서 벗어나 내면의 해탈과 평등성을 외쳤다.
이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그들이 당시 지배적 시스템의 정당성을 위협했다는 점이다.
종교는 단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재구성’이었다.
오늘날 종교는 대체로 체제와 공존하거나, 심지어 그 체제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윤리와 결합되어 “개인의 책임, 근면, 축복”을 강조했고, 불교는 마음챙김과 자기계발의 도구로 소비된다. 이슬람조차 어떤 지역에서는 국가 권력과 결합해 억압적 체제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종교의 ‘순수성’이 사라졌다는 인식을 불러온다.
종교가 체제와 공존하는 순간, 고통을 감싸는 담요는 될지언정, 고통을 없애는 힘은 잃는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종교가 가장 순수했던 시기는 그것이 탄압받을 때였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종교는 인간 내면의 진실한 갈망과 외부 구조의 모순을 동시에 응시했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외침이자 거부였다.
예수는 체제를 전복시키는 메시지를 전했고, 루터는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의 결탁을 찢어냈다. 석가는 고행을 부정하며 기득권의 카르마 구조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종교는 고통에 타협하는 순간 죽는다.
탄압받는 순간, 종교는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
현대 종교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단지 안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정면으로 묻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 자신 또한 신학을 한다면, 이 구조의 질문을 피해선 안 된다.
내가 믿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체제를 승인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의 손을 잡는 자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