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시대와 문화, 그리고 종교에 따라 극명하게 다르다.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 특히 상실, 슬픔, 절망 앞에서 종교는 언제나 어떤 ‘설명’을 부여해왔다. 단지 설명일 뿐만 아니라, 고통의 감정이 머무를 자리를 정하고, 그 감정의 양태를 형성해준다.
기독교는 고통을 하나의 통과 의례로 해석한다. 이 고통은 원죄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고통을 견디고 신을 따름으로써 인간은 궁극적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순간부터, 기독교의 고통은 의미를 가진 고통이 되었다. 그것은 헛된 고통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고통이며, 구원을 위한 헌신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감정 구조에서는, 슬픔은 단지 인간적인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 무릎 꿇는 마음의 자세이다. 주인을 찾고, 고개를 숙이며, 고통 속에서도 순종함으로써 신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자세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감정을 신과의 관계 속에서 정화하는 방식으로 설정한다.
반면 불교와 힌두교는 고통 그 자체를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苦)’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식의 오류 혹은 무지에서 비롯된 환상이라고 본다. 불교의 사성제는 삶이 본질적으로 고통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애착을 놓는 길, 그리고 ‘나’라고 여긴 자아의 경계를 해체하는 길이다.
죽음은 불행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다. 윤회라는 커다란 흐름 안에서 죽음은 한 형태가 사라지고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밀한 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사실상 내 감정의 착각이다. 감정은 덧없고, 진리는 덧없지 않다. 불교와 힌두교에서의 감정은 해탈의 과정에서 서서히 벗어나야 할 그물이다.
이렇게 보자면, 종교는 단지 신을 믿는 체계가 아니라, 감정을 규정하는 문화적 명령 체계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정화의 계단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불교와 힌두교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무명을 강화하는 것이라 경계한다.
하나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라 말하고, 다른 하나는 고통이 무지라고 말한다.
오늘날 현대인은 다수의 종교적 유산을 혼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우리는 종교가 설계한 감정의 태도들 속에 산다. 나는 슬퍼해야 하는가? 아니면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가? 내 감정은 진실한가? 혹은 그것은 학습된 허상인가?
이 물음은 결국 고통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나 자신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종교는 감정의 주인을 외부(신) 혹은 내부(자기)에 둠으로써, 인간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달리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