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내가 시대에 잘못 태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부조리한 권력 앞에서는 분노하고, 힘없는 자들의 고통 앞에서는 마음이 무너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은 그 반대다.
강자에게는 굽실거리고, 약자에게는 잔인하다.
한국 사회는 그 구조를 특히 잘 드러낸다.
권위에 대한 과잉 존중, 집단에 대한 맹종, 그리고 체제에 대한 미묘한 체념.
그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은 부적응자가 된다.
강자에게 목소리를 높이면 ‘미쳤다’고 하고,
약자에게 손을 내밀면 ‘왜 참견하느냐’고 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세상의 규칙에 의문을 품었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이유도 없이 소리를 지르면, 나는 속으로 ‘왜 저렇게 말하지?’ 하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친구가 집단 따돌림을 당할 때, 나는 침묵할 수 없었다.
결국 나도 ‘좀 이상한 애’가 되었다.
이 기질은 타고난 것이다.
정의감이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히는 ‘부정의에 대한 과민 반응’이다.
나는 내가 불리하더라도 부당한 것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그리고 이 기질은 때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현실은 강자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정의’보다 ‘질서’를 중시한다.
질서는 때때로 정의와 충돌한다.
누군가 힘이 세다는 이유로 군림하고, 누군가 약하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묵인한다.
‘어쩔 수 없어’,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이 말들은 나를 질식시킨다.
도대체 우리는 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사는가?
왜 누구도 바꾸려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 자신도 깨닫는다.
나는 강자에 대들 수 있는 기질을 가졌지만, 사회적 힘은 없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올곧더라도, 그 기질은 기능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1970년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억눌린 자들과 함께 공장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불의한 권력에 계란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옳음’이라는 말이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동운동은 제도화되고, 정의는 마케팅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고, 조용한 중립을 선택한다.
나는 이 시대의 투사가 되기엔 너무 많은 허공을 상대해야 한다.
나는 지금 ‘투쟁’을 할 곳을 잃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기질’이 아니라, 형태다.
예전의 투사가 ‘거리에 나섰다면’, 지금의 투사는 언어로 싸운다.
기록하고, 말하고, 증언하고, 구조를 해체한다.
기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문장을 갈망할 뿐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이다.
불의를 본다.
사람들이 침묵하는 그 장면을 기록한다.
약자가 침묵하지 않도록 구조를 말한다.
그리고 내 감각을 잃지 않는다.
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기질을 가졌다.
그러나 그 기질은 나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변형된다.
비겁한 세상 속에서 비겁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언어를 무기로 삼는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존엄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