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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글을 쓴다는 것

세 아이의 엄마,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

by 장서나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둘째를 학원에 들여보내 놓고, 미처 못 챙긴 내 점심을 급하게 차리다가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70일이라는 기나긴 초등학교 겨울방학을 보낸 뒤, 세 아이의 새 학기 준비를 하다 보니 그야말로 시간이 날아간다.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책은 계속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흘을 굶어 배고픈 사람처럼, 쪼개진 시간을 이어가며 읽었다. 책은 마치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간간이 짧은 글은 스레드에 발행해 왔지만, 긴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누군가는 한 달에 한 권 책 읽기도 힘들고 그럴 여유조차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책 읽기'는 사실 TV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공들여서 맛있고 짜임새 있게 차려놓은 음식을 작가가 다 떠먹여 주는 느낌. 음식을 소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나에게 책 읽기는 맛난 밥상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어떠하냐. 글쓰기는 그야말로 '나'다. 내가 나를 돌아봐야 쓸 수 있고, 그 생각이 정리되어야 글자가 된다(물론 많은 경우 글을 쓰면서 정리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 글쓰기가 더 쉽게 접근하기 어렵기도 하다.





3월이 되고, 드디어 봄이 왔다. 겨우내 고요하던 놀이터에는, 그때의 고요함은 생각나지도 않게 아이들이 북적거린다. 작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시끌벅적하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생기가 넘친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시간도 줄어든다. 그래도 어쩌겠나. 놀아야 아이 아니겠는가. 노는 건 아이들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엄마의 바쁜 마음은 그냥 엄마의 문제일 뿐.




세 아이를 돌보는 것은 몸이 바쁜 일이다. 마음은 그보다 더 바쁘다.


그럼에도 글을 쓴다. 마치 "나 아직 살아있다!"라고 아우성치듯. 엄마의 글쓰기는 때론 전투적이다.


(여기까지 쓰고, 둘째 아이를 다시 다른 학원에 데려다주고 왔다. 급하게 점심을 먹으며 다시 적는다.)




며칠 전, 독서 모임에서 김수현 작가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함께 나눴다. 책의 끝부분에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를 무엇으로 행복한가

나는 무엇으로 회복하는가

나는 어느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나와 마찬가지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모임원은 "자연, 휴식, 책, 여유, 가족 건강"을 말하며 행복을 이야기했다(작년 7월부터 독서 모임을 하면서 '책'이 행복의 한 요소가 된 것에 놀라워했다). 또 독서모임을 시작하며 동화를 쓰기 시작한 다른 모임원은 "운동"과 "글쓰기 구상"을 할 때 행복하다고 이야기했다(독서 모임 전에는 글을 전혀 쓰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글쓰기 구상'이 행복하다니! 모두 감동했다). 나는 "맛있는 음식, 아이들을 안고 있을 때,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을 누릴 때"라고 답했다.


무엇으로 행복한지, 무엇으로 회복되는지, 어느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 세 가지가 결국 다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을 느끼면, 회복하게 되고, 그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함께 책을 읽고 나누며, 우리는 '행복'에 대해 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책'은 우리에게 이제 평생 함께 갈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더불어 '글쓰기'라는 새로운 길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나다움'을 찾는다. 애써 찾은 '나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나에게 시간을 내준다. 나만의 행복과 삶의 균형을 위해서.


삶의 분주함 속에서도,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로 존재한다.

그저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래서

그럼에도 글을 쓴다.


그렇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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