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논이Noni Aug 20. 2020

집순이 화가의 마스터피스

영국에서 자가 격리 중인 그림쟁이의 마스터피스 생산기

열이 나기 시작한 건 3월 27일이었다. 두통, 발열, 오한.. 가끔가다 나는 마른기침으로 증상이 의심스러웠고, 코로나면 어쩌나 덜컥 겁부터 났다. NHS에 다니는 남자 친구에게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넌 검사 못 받아. 숨넘어가는 중증환자만 검사받고 입원할 수 있어. 게다가 여긴 한국보다 진단키트도 병상도 부족해서 안타깝지만 경증인 너는 병원에 갈 수 없어." 그의 눈빛은 조국에 대한 쪽팔림으로 흔들렸다. 그렇다.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그림 그리러 머문 지 4년째 되던 해 나는 코로나라는 날벼락을 맞아버렸다. 무늬만 선진국인 대 영 제 국에서..

앓기 시작한 지 19일이 지난 오늘도 나는 미열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다 나은 듯하다가도 기온이 내려가는 새벽녘 잠시라도 한기가 느껴지면 원점으로 돌아와 골골 좀비가 되고 마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바이러스와 한 몸이 되어 자가격리 중이다. 아직도 내가 코로나에 걸렸는지 독감에 걸렸는지 몰라 답답하지만 워낙 집순이 체질이라 나름 격리생활을 즐기고 있다. 누군가 그랬지. 코로나 19로 인해 지구 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마스터피스를 토해내고 있다고.


지금까지 작업한 그림들 중 나의 마스터피스는 어떤 그림일까?





그림쟁이인 나 역시 지난 11월 브로닌이 주문한 그림을 유화로 그리고 있다. 브로닌은 오클랜드에 있을 때 알게 된 키위(뉴질랜드 사람)로 그녀가 한 달간 크루즈 여행을 간 동안 고양이와 집을 돌봐주며 하우스 시터와 하우스 오너로 인연을 맺게 된 사이다. 인터뷰로 한 번, 첫 입주 때 한 번을 끝으로 단 두 번 얼굴 본 사이에 웬 그림 주문인가! 너무나 감사했다. 그 집에서 있는 동안 충성을 다해 뙤약볕 아래서 잡초를 뽑던 일들, 고양이가 물어온 새와 쥐 시체를 치우던 일들이 오버랩되며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났다. 페북 친구로 지내며 종종 안부 묻고, 새로운 하우스 시팅 할 때 레퍼런스가 되어주십사 부탁드리며 내가 만든 도자기 목걸이며 그림 프린트 등등을 뇌물로 보내드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우스 시팅 끝날 때 고양이 스모키의 연필 초상화를 그려드린 것이 부잣집 마나님의 마음을 최초로 움직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작년 브로닌이 페이스북에서 본 내 그림들을 좋아한 것이 결정타였다. 긴 이메일로 우리는 그림에 대해 의논을 시작했다. 상상력 풍부한 환상적인 그림을 선호하는 그녀는 나와 취향이 너무도 닮아있었고, 신기하게도 공통점이 많아 영혼의 친구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어떤 주제로 그려도 상관없다 했지만 나는 브로닌이 좋아하는 것들을 그려야겠다는 느낌이 들어 Bronwyn's favourite things를 물어보고 그것들을 그림으로 옮겨 한 폭의 유화로 탄생시키기로 결정했다.



언더 페인팅 작업 중

피아노 연주와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고양이 스모키와 어릴 적 키우던 비글, 오렌지색과 흰색 아마릴리스 꽃과 난 꽃, 제라늄  그리고  노란 눈 펭귄, 뉴질랜드 숲 비둘기, 키위새, 코끼리, 흰 호랑이, 부처님 등등 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주문에 스모키와 책 읽는  브로닌을 주인공으로 정하고 그림 중앙에 모셔놓은 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냄새와 독성 때문에 유화물감을 전에는 다뤄본 적이 없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고 늘 쉽게 접할 수 있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에 유화 그리는 방법을 존경하는 미국 화가의 인터넷 강의로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Falkland에서 하우스 시팅 할 때 채색 작업 중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수채화, 아크릴화 와는 차원이 다른 기법이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이제는 살짝 익숙해진 유화 작업이 나날이 즐거워져 다행이다. 브로닌은 어떤 재료를 써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이 그림을 오래오래 대대손손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에 자작나무 패널 위에 최고급 유화 물감을 써서 작업하고 있다.

(유화 물감은 Old Holland 상표)






오후에 햇볕이 가장 잘 드는 방에서 쉬엄쉬엄 그리는 중




그림이 반 정도 완성된 시점에서 브로닌을 처음 만난  2013년을 떠올려 본다.


네 번째로 뉴질랜드에 발을 디뎠을 때 집세를 아낄 목적으로 Kiwi House sitters에 가입하고, 한 달 동안 하우스 시터를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간 브로닌의 집은 오클랜드 시티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외곽에 있었다. 드넓고 아름다운 보타닉가든이 이웃해있는 근사한 동네답게 잘 정돈된 정원과 으리으리한 집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고, 브로닌 역시 사랑스러운 정원이 어우러진 멋진 집에 살고 있었다(일주일에 한 번씩 정원사와 청소하시는 분들이 오실 정도로 관리가 잘 된 집이었다).


브로닌의 가든 곳곳에 자리잡고 있던 장식품들
나와 취향이 비슷한 브로닌의 심미안


첫눈에 보아도 참 다정하고 우아한 중년의 키위 여인인 브로닌은 잿빛 회색 고양이 스모키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고양이 사랑이 너무나도 지극해 하루 십 분씩 서너 번 이상 고양이 전용 빗으로 털을 빗겨줄 정도로 자상한 애묘가였다. 그런 운 좋은 스모키에게는 디자인과 용도가 제각기 다른 5개의 빗이 있었다. 지압 슬리퍼처럼 고무 돌기가 있는 고양이 피부 마사지용 장갑, 참빛처럼 촘촘한 빗(짧은 털용으로 주로 머리 긁을 때 쓴다), 양면이 다른 꽤 비싸 보이는 질 좋은 브러시, 스모키가 가장 시원해하던 끝이 살짝 뾰족한 네모난 빗...  짧은 플라스틱 빗 하나로 5년째 버티던 나보다 주인 잘 만나 호강하는 스모키에게 털공주라는 별명도 지어주고 시녀가 되어 열심히 빗질을 해드렸다. 똑똑한 스모키는 나에 대한 적응이 굉장히 빨랐다. 브로닌이 여행을 떠난 날부터 내게로 와 갖은 아양을 떨고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다정하게 대해줘 한 달간의 하우스 시팅이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첫째 날 밤. 내 방 방문을 박박 긁어대며 미친 듯 야옹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밖은 아직도 깜깜했고 너무 졸려서 일어나는 게 괴로웠지만 미친 털공주를 빗질해주고 사료를 주고 나니 이미 잠은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스모키는 아침잠 많은 나를 새벽마다 고문시켰다. 알람이 필요 없었다. 정확히 다섯 시. 서머타임 실시한 이후부터는 정각 여섯 시면 어김없이 방문을 긁고 울어대니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끔 잠에 취해 못 일어나는 경우엔 온몸을 던져 방문에 몇 번이고 지 몸뚱이를 부딪혀서라도 나를 깨우던 헐크냥 스모키.. 그 문짝 부서지는 소리에 못 일어날 인간은 없을 거다.


6년의 시간이 흘러 아침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의 나로선 천연 알람시계인 스모키가 반갑겠지만 밤 귀신같던 그 당시엔 미칠듯한 고역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스모키를 돌봐준 인연으로 고가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미 재료비를 비롯한 선금을 받아 마스터피스를 제조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고문도 달게 받을 만했다. 고마워 스모키. 예쁘게 그려줄게!


Smokey

덧붙이면 지금 스모키는 브로닌이 일 때문에 지역을 옮기고 이사를 하면서 돌봐줄 시간과 여력이 없어 결혼한 아들 집에 맡겼다고 한다. 주책바가지이지만 사람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특별한 고양이라 어딜 가나 사랑받을 게 분명하니 걱정은 없다. 그저 오래오래 건강하게만 지내기를..






*4월 중순에 쓴 글에 그림과 사진을 첨부하여 드디어 발행합니다. 두달동안 앓았던 몸은 완전히 나았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브로닌이 주문한 그림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브로닌이 사랑하는 것들, 자작나무패널위에 유화, 2020


*안타깝게도 2020년 이 그림을 완성하고 1년 뒤인 올해 여름 스모키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브로닌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림속에서 책읽는 브로닌을 영원히 지킬 스모키의 명복을 빕니다.






더 많은 그림들 보러오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매거진의 이전글 스위스에서 잃어버린 엽서를 한국에서 찾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