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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부자 안나 크리스티나의 정체는?

은행 소유? 포르투갈 별장!

by 논이

브라이튼에 도착 후 베기스 백패커스에서 지낸 지 몇 주가 지나자 그곳 사람들과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나처럼 방을 못 구하거나 베기스 특유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좋아해 장기 투숙하는 유럽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동양인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자기 몸만 한 대형수케이스를 끌고 다니던 대만소녀 쬬쬬,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던 인도청년, 빈대 물려 개고생 하던 가여운 일본소년은 친해지기도 전에 잠시 머물다 떠나버렸다. 한 달 이상 숙식하는 사람들 중 영국 주민이 가장 많았고, 체코,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웨덴, 호주 등 국적이 다양했다. 20대가 가장 많았지만 십 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폭넓었다.



뉴질랜드에서 만들어 팔던 책목걸이를 영국에 가져간 계기로 안나와 친구가 되었다.



"이 목걸이 네가 만든 거야?"

같은 도미토리에서 묵던 브라질 여인 '안나 크리스티나 안나'가 내가 만든 책 목걸이에 큰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사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안 팔리고 남은 걸 그냥 줬더니 그때부터 나만 보면 눈을 반달처럼 뜨고 쌈바춤을 추는 듯한 브라질 하트를 신나게 발사했다. 그 이후 안나는 숙소 소파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강제로 불러다 앉히고 내 목걸이를 대신 팔며 장사꾼 수완을 발휘한 덕분에 용돈을 짭짤하게 벌어 너무나 고마웠다. 안나는 밤만 되면 목젖과 콧바람을 힘껏 이용해 끔찍한 콘서트를 열던 악명 높은 코골이 환자였지만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었다(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질환이니 단점이라고 하기엔 가혹하다). 호탕하고 늘 밝은 웃음 넘치던 정 많고 명랑한 안나 덕분에 베기스는 항상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안나는 그곳의 유일한 장기투숙 동양인인 나를 마치 이모처럼 잘 챙겨줬고 나도 그녀에게 조카처럼 의지했다.


"와 그 카메라 렌즈 정말 크다! 안나 네 거야? 사진 찍는 거 좋아하나 봐!?"

"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야."

안나의 카메라 렌즈는 내 허벅지보다 굵고 컸다. 사진 찍는 게 취미였던 그녀의 사진솜씨는 수준급이었고 웃음기 싹 뺀 채 사진 찍으며 반전매력을 풍길 때 정말 아름답고 열정적으로 보였다. 고급사진기를 손에 쥐고 세계곳곳을 여행하며 인생을 즐겁게 사는 이 매력적인 브라질여인이 나는 좋아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많이 친해졌을 무렵 안나가 말했다.

"노니, 언제든 포르투갈에 놀러 와. 포르토에 내 집이 있어. 언제든 환영이야."

"정말? 꼭 가보고 싶어!"

"꼭 와. 진심이야."

"고마워 안나!"

나는 포르투갈로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 궁금증에 휩싸였다.

"안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안나가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안나 진짜 브라질 부자지? 나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돼. 도대체 너 누구냐? 너의 정체가 뭐야?"

장난기 어린 질문을 던지자 안나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며 말했다.

"노니, 이거 비밀인데 나 사실은 브라질에 은행을 하나 가지고 있어."

"뭐? 은행?"

"응.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안나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안나가 은행을 소유한 부자라니 입이 벌어지고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은행도 있는 부유한 사람이 백패커스에 머물며 청소를 한다고?


그랬다. 안나는 숙박비를 안내는 대신 매일 오전마다 베기스 청소를 했고 그렇게 살뜰하게 여비를 아껴가며 여행하고 사진 찍는 부지런한 구두쇠 노마드였다. 은행이 있다고 한건 아무래도 영어가 짧은 그녀가 은행계좌가 있다는 말을 그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지만 포르투갈에 있다는 별장과 커다란 고급 카메라를 보면 결코 빈곤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 특유의 그 여유 있는 눈빛과 늘 당당한 모습은 내면이 한없이 풍요로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부자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포스를 지닌 감정의 부자 안나는 행복지수검사를 하면 상위 1%에 들고도 남을 것이다.


밤늦도록 파티가 있던 주말,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나의 표정이 브라질이 축구에서 졌을 때보다 더 침울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입을 열어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조준을 못해서 변기밖으로 한 덩이를 떨군 후 그렇게 바닥에 나뒹굴던 것을 즈려밟고 돌아다닌 바람에 바닥이 난리가 나 청소하느라 아침부터 고생을 한 것이다. 화장실 바닥은 물론이고 카펫이 깔린 복도까지 치우느라 탈탈 털린 가여운 삼바의 여인. 그 동병상련을 잘 알기에(뉴질랜드에서 하우스시팅 첫날 할머니 고양이 루카가 나를 몹시 싫어해 거실 카펫 위에 똥테러를 저지른 통에 아침부터 치우느라 고생했었다. 그래도 걘 그걸 밟고 돌아다니진 않아 양반이었다) 하소연하는 안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고충을 위로해 줬지만 입을 틀어막아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술을 퍼마셨으면 그런 대실수를 범한 것일까? 안나는 이를 갈며 범인을 잡고 싶어 했지만 그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똥테러의 흔적을 깨끗이 청소한 안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어느 부슬비 내리던 저녁, 병든 닭처럼 침대에 누워있던 안나를 보고 괜찮냐고 묻자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평소보다 기운 없는 모습으로 그녀가 답했다. 마침 슈퍼마켓에 가는 길이었고 안 된 마음에 필요한 게 있으면 사다 주겠다고 제안하자 안나가 1파운드를 건네며 생강을 사달라고 해 장을 보며 생강 한 움큼을 사 베기스에 돌아와 거스름돈과 함께 건네주자 굉장히 고마워하며 ㅅ자 눈썹을 한채 뜬금없이 내 나이를 물었다. 나이를 말하자 한동안 눈이 커진 채 말이 없던 안나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노! 말도 안 돼!"

뭔가 한참 잘못됐다는 볼멘 목소리와 짜증 난다는 눈빛이었다. 안나도 나와 동갑이었던 것이다. 이모가 아니었어! 나는 안나가 족히 50은 됐을 거라 예상했었고 안나는 나를 한참 어리게 본 거다(거듭 말하지만 동안소리 듣고 싶으면 유럽에서 살기를 추천한다). 해변에서 매일 일광욕을 즐기고 해를 거의 만병통치의 신처럼 모시는 브라질 여인에게 피부노화가 일찍 찾아온 것은 당연했다. 안나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나더러 모자 좀 그만 벗고 제발 햇볕 좀 쬐라고 매일같이 잔소리를 했다. 햇살이 모든 병을 낫게 해 주고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안나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고 여전히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다닌다.


여름이 끝날 무렵 안나는 베기스를 떠나 포르투갈의 집으로 갔다. 놀러 오라고 노랠부르던 그녀의 초대에 응하지 못해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그해 겨울이 되기 전 안나가 브라질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안나는 내가 선물로 준 코끼리 그림 프린트를 액자에 넣어 그녀처럼 상큼한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방벽에 걸린 사진을 보내주었다. 몇 달이 지나고 안나가 여행책을 냈다는 경사를 접했다. 열정으로 찍은 사진들과 영국에서의 멋진 추억을 기록한 여행기로 브라질에서 여행작가가 된 안나 크리스티나 안나. 십 년 전, 항상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던 밝고 순수한 안나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여행작가로 거듭난 그녀는 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일광욕만큼은 별로 따라 하고 싶진 않다.


해를 사랑하던 안나가 그리워지는 햇볕 따사로운 봄날이다.




안나가 베기스에서 요리한 저녁식사




베기스에서의 저녁 만찬. 제일 왼쪽이 안나와 나
안나와 함께 한 브라이튼 게이프라이드 축제에서






안나에게 선물로 준 코끼리 그림 프린트. 캔버스 위에 아크릴. 2009-2012년 논이 그림.




브라이튼에 있을 땐 그려보지도 않던 브라이튼 집들을 그리운 마음 담아 드로잉해본다


펜 드로잉이 끝난 후 색연필로 쓱 채색. 그러나 밍기적거리느라 오래 걸렸다
아르쉬 세목 위에 피그마 펜, 파버카스텔 수채색연필. 논이 그림. 그림이 안그려지거나 심란할 때 법화경을 사경하기도 한다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nonichoiart 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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